[의복의 역사] 의복의 기원, 원시시대, 삼국시대 복식_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복식, 통일신라시대 복식, 발해 복식, 고려시대 복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의복의 역사] 의복의 기원, 원시시대, 삼국시대 복식_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복식, 통일신라시대 복식, 발해 복식, 고려시대 복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의복의 기원
1) 신체 보호설
2) 수치설
3) 장식설
4) 심리적 보호설

2. 원시시대

3. 삼국시대 복식{고구려, 백제, 신라}
1) 고구려 복식{고분벽화 인물상과 고문헌 자료 중심으로}
2) 백제 복식
3) 신라복식
4) 가야복식

4. 가야복식

5. 통일신라시대 복식 {고분에서 사온 토우를 중심}
1) 통일신라 남자 복식
2) 통일신라 여자 복식

6. 발해 복식 (정효공주 묘의 벽화를 중심)
1) 남자 복식
2) 여자 복식

7. 고려시대 복식
1) 남자 복식
2) 여자 복식
3) 서민복

참고문헌

본문내용

투박한 재질로 만들었다. 호모(胡帽)의 일종이다. 같은 벽화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볼 수 있는 것은 발해 복식의 풍부한 일면을 보는 것으로 신분과 관계된 복식 체제 외에도 같은 신분 내에서도 복식이 다양했음을 보여 주는 단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은 검은색 가죽신과 삼신을 신고 있는데 모두 신코가 도드라져 있지 않다.
2) 여자 복식
연해주 출토의 청동 인물상에서 그 당시 여성복의 일말을 엿볼 수 있다. 길이가 지면까지 오고 소매가 넓은 포(袍)를 입었다. 포(袍)위에 반소매 끝에 장식선이 달린 반비(半臂)를 입었다. 반비(半臂) 위에는 여의(如意)모양의 구름 형태로 된 어깨를 덮는 운견(蕓肩)을 걸쳤다. 운견은 재단이나 문양이 정교하게 장식된 여성용 복장이다. 운견은 보온의 효과를 위해 입기도 했지만 점차 장식성이 강해졌다. 가슴 아래에서 끈을 묶고 그 끝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7. 고려시대 복식 김미자 『우리옷 이천년』미술문화, 2001년 p45~53
고려 복식을 알 수있는 유물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는 매우적어 [고려도경], [고려사] 등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 여복지 서문에서 고려복식의 개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자 복식
(1) 백관복
고려 시대 백관복에는 제복, 조복, 공복, 상복이 있었다.
- 제복 : 의종조 상정 백관 제복은 계급에 따라 칠류면(七旒冕)칠장복(七掌服),오류면(五柳冕)오장복(五章服), 삼류면(三旒冕)삼장복(三章服), 삼류면(三旒冕)일장복(一章服), 평면(平冕)무장복(無章服)이 있었다.
- 조복 : 송의 제도를 인용한 것으로 조선시대와 유사하다.
- 공복 : 고려의 공복은 제4대 광종(光宗) 11년(959)에 제정되었다. 원윤(元尹)이상은 자삼(紫杉)이고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杉), 도향경 이상은 비삼(緋杉), 소주부(小主簿)이상은 녹삼(綠杉)으로 사색공복 제도였고 후주(後周)의 공복 제도 였다. 강민첨(963~1021) 상의 공복은 흑색 복두를 썼는데 끈이 달려 있어서 턱 밑에서 매고 있다. 옷깃은 분홍색 곡령(曲領)이고 길은 짙은 고동색이지만 자색(紫色)이 변한 듯하다. 수구에는 옷깃과 같은 색인 분홍색 선()을 대었다. 손에는 홀을 들었다. 공민왕 상도 수구에 옷깃에 이색 선을 두른 공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송의 제도를 본딴 의종조 상정 공복 제도는 옷깃과 수구에 선이 없는 것이다. 4품 이상 자색흥정금어상홀, 6품 이상 비색홍정은어상홀, 9품 이상 녹색목홀 두 가지 형태가 병용되었다.
- 상복(단령) : 둥근 옷깃 때문에 단령(團領), 원령(圓領)이라고도 한다. 고려 우왕 13년(1387) 6월에 명의 광복 제도를 따라 관복을 다시 정했는데 1~9품까지 사모단령이고 대(帶)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 이색 상은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대를 매며 화를 신었다. 단령과 사모의 모양은 중국과 같았다.
(2) 일상복
- 직령 : 직령은 고려 우왕(禑王) 13년(1367) 6월에 명나라 제도에 의해 단행한 관복 개정시하류계급이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고려말 대제학을 지낸 이조년(1269~1343)의 아들이포 영정에서는 직령을 착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입혀지고 있었다. 머리에 발립을 쓰고 홍색 직령에 사대(絲帶)를 띠고 화를 신었다. 직령은 조선에 전해져 말기까지 계속 착용되었다.
- 심의 : 심의는 주자학과 함께 원에서 들어온 유학자들의 법복이다. 조선에 전해져서 말기까지 유학자들이 입었다.
- 철릭 : 철릭은 고려시대 원에서 들어왔다. 고려 가사 중 정석가에 “무쇠로 철릭을 마라나난”이라는 구절은 싸움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철릭을 쇠로 마름질하고 철사로 바느질한다는 뜻이다. 철릭은 의와 상(치마)을 따로 재단하여 봉재된 옷으로 곧은 깃이다. 중국의 백과사전인 [삼재도회]에 철릭을 입고 있는 고려인을 소개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민들이 많이 입던 옷이다. 열름에는 모시로 만들어 입었다. 철릭의 허리 부분에 선을 넣어 장식한 것을 요선철릭이라고 한다
- 답호 : 답호는 옆트임이 있는 반소매 포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것이다. 답호는 징기스칸과 함께 몽고인들이 긴 소매 포 위에 착용한 옷으로 원대(元代) 유물도 있다. 고려시대 답호 유물은 문수사(文殊寺)의 답호(1346년)와 해인사 답호(1350~1362년)가 있다.
- 두루마기 : 삼국시대 기본 포가 서민들에게 계속 입혀져 두루마기가 되었다. 목우상을 통해 긴 무루마기를 입고 끈을 맨 것을 볼 수 있다.
(3) 승려복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므로 승려 계급이었다. 승려복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비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4) 궁복, 갑주
갑주(甲)란 싸움터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던 호신구로 짐승 가죽에 철제, 동제, 목제 등으로 만들어 쓰다가 화약 병기를 쓰면서 지휘관복이나 의식용복으로 쓰게 된다. 갑주 양식은 고려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갑주와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이후 화약 무기의 발달로 민첩한 행동을 하기에 불편한 철제 갑옷은 쇠퇴하고 포형(袍形) 갑옷인 두정철갑이나, 두정피갑, 경번갑, 면갑으로 되었다. 이 포형 갑옷은 우리의 독자적인 갑옷 양식으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한국의 전형적인 갑옷양식으로 정착되었다.
2) 여자 복식
귀부녀는 황색 치마를 높이 치켜 입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시녀와 같이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등에 숄을 둘렀다고 본다. 고려시대 불화인 수월관음도에 귀부녀가 그려져 있는데 붉은 치마 저고리를 입었다. 붉은 치마에는 꽃무늬가 있으며 저고리는 길이가 길며 옆에 트여져있다. 머리는 뒷통수 쪽에 크게 올려서 붉은 끈을 맸으며 흰색 진주 같은 것을 머리 전체에 장식했다.
3) 서민복
서민들은 삼국시대 기본 복식인 상(裳)과 유()를 계속 입어 치마저고리가 되었다. 치마저고리란 명칭은 고려 말에 생긴 용어이다.
참고문헌
조효순 저,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전호태 저,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김은정, 임린 저, 역사 속의 우리옷 변천사, 전남대학교출판부 2009
김정호 저, 우리 옷 역사 2000년, 글누리 2012
  • 가격2,3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4.06.23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563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