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의 이해_조선시대의 술 문화]- 금주령(금주령의 전개와 영조의 금주령으로 벌어진 문제점, 금주령의 쇠퇴), 술집과 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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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의 이해_조선시대의 술 문화]- 금주령(금주령의 전개와 영조의 금주령으로 벌어진 문제점, 금주령의 쇠퇴), 술집과 술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금주령
1) 금주령의 전개
2) 영조의 금주령으로 벌어진 문제점
3) 금주령의 쇠퇴

2. 술집과 술문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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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술집은 조선 후기에 출현하였다. 그런데 술집에 관한 기록은 그래도 드물다. 왜일까? 술과 술집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일상화된 영역에 속한다. 일상화된 것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기록에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닌 때문이다. 이것이 특히 개인의 기록에서 술집과 관련된 내용을 찾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한다.
「방찬이 또 응선을 꾀어 술집에 가게 하여 취한 틈을 타서 방찬이 그 호패를 잘라서 주고 이홍발에게 갖다 주게 하였는데, 제가 그 말대로 전하여주었습니다. -<숙종실록> 22년 7월 24일 (업동의 사건기록)」
업동의 사건은 매우 복잡하여 자세히 살피기는 어렵고, 다만 이를 통해 숙종 22년에 술집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실록> 4년 6월 18일 조에 실린 형조판서 서명균의 상소는 퍽 중요하다.
「듣건대, 근래 도민의 살 길이 점점 어려워저서 술을 팔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그 가운데에서 많이 빚은 자는 혹 1백 곡이 넘기도 하였으나, 시가가 뛰어올라 폭력을 휘두르고 살상까지 한다 합니다. 차츰 금지하려고 신칙하는 뜻으로 오부에서 감결을 받았는데, 나라의 풍속이 두려워하고 와전되어 금란을 가탁하여 속이고 협박하며 뇌물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가탁하는 자 두어 사람을 잡았더니, 바로 사헌부에서 내쫓긴 하인과 포도청에서 물러난 군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부터 술집에서 내기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그쳤는데 쌀가게에서 부르는 값은 갑자기 더하므로, 바야흐로 들어가 아뢰어 먼저 술 많이 빚는 자를 금하고 이어서 옛 제도를 더욱 밝히기를 청하려 하는데 승선이 문득 폐단을 끼친다고 말하니, 폐단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가져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술집이 늘어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술집에서 내기술을 마시는 일”이란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는 분명 병술집이 아닌 주점이다. 시정에 확실하게 주점이 출현한 것이다. 영조는 2년 전 붕당과 사치와 음주의 폐해를 신하들에게 간곡하게 언급하였음을 상기시키고,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하여 훗날의 대사령 때에도 용서하지 말라고 명한다.
서명균의 상소가 있고 난 석 달 뒤 <실록>의 기록을 보건대, 영조의 명으로 술집에 대한 단속이 철저하게 진행된 듯하다. <영조실록> 4년 9월 16일 조에 실린 사간 강필경의 말에 의하면, 단속으로 인하여 술집이 일시에 거의 종식되었던 모양이다.
「주금을 신칙한 뒤로 술집으로 이름난 것은 모두 술 빚는 일을 끊었습니다.」
정조가 신임했던 채제공은 술집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매주가(賣酒家)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신기한 술 이름을 내기에 힘써 현방(懸房)의 쇠고기나 시전(市廛)의 생선을 따질 것도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들어갑니다. 진수성찬과 맛있는 탕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시정의 연소한 사람들이 그리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오로지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사서 마십니다.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 시전의 찬물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희귀한 자료는 정조대 술집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채제공은 1720년에 태어났다. 이 자료의 연대가 정조 16년(1792) 9월 5일이니, 그의 생애의 전반기는 영조시대에 걸친다. 금주령이 삼엄했던 시절 술집 안주란 김치와 자반 같은 소박한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정조 이후 금주령이 완화되고 난 뒤 술집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자, 술의 종목과 안주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경쟁적으로 새로운 술을 개발하고, 안주로 현방의 쇠고기나 시전의 생선 등이 등장했던 것이다. 술보다 안주에 혹하여 파산하는 자가 있다 했으니, 술집의 영업이 날로 번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정의 술집이 발달하면서 점차 그 종류도 다양해졌을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연구된 것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까지 서울 안에 음식점은 목로(木爐)술집·내외(內外)술집·사발막걸리집·모주(母酒)집이고, 이채를 띠고 여자가 조흥(助興)하는 술집은 색주가뿐이었다. 목로주점은 서서 술을 마시는 선술집이고, 내외주점은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파는 술집”이다. 그리고 색주가는 여자가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는 그렇고 그런 술집이다(매음도 한다).
다음 ‘사발막걸리집’은 국어사전에 사발막걸리를 파는 목로라고 정의 내려져 있다. 사발막걸리는 사발 단위로 값을 정하고 파는 막걸리다. 곧 사발막걸리 집은 목로주점의 형태이긴 한데, 막걸리만 팔고 안주도 훨씬 간단한, 말하자면 급수가 처지는 간이주점이 아니었던가 한다. 모주집은 말 그대로 모주를 파는 술집이다. 모주란 ‘술찌끼를 걸러 마시는 것’으로 “술 중에 천품이요, 빈한한 자와 노동자의 반양식이라 없지는 못할 것이며, 추운 새벽과 해질녘에 이런 사람의 일등 가는 요리”였다. 술찌끼를 다시 걸러 마시는 모주는 비지에 무청이나 김치 따위를 넣어 끓인 전골을 안주 삼아 먹는 노동자의 술이었다.
이 다섯 가지 술집 중에서 조선시대에 존재했음이 문헌적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은 목로주점과 색주가뿐이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목로주점이 나오고,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19세기 저작)에 “젊은 계집이 있는 술집을 색주가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으며 조금 더 소급하여 18세기 후반 경에 생겼다고 보아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리하면 대개 정조 때와 비슷한데, 그 이전 영조 때 금주령이 시행되었음을 생각한다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영조 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정대성 저 우리 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혜, 이회문화사 2006
정동효 저, 우리나라 술의 발달사, 신광출판사 2004
조정형 저, 다시 찾아야할 우리의 술, 서해문집 2010
이종기 저, 술 이야기, 다할미디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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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23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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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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