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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능률에 따라 분배하는 임금제도도 비판하였다. 이러한 모습의 한 예로 토지개혁을 들 수 있는데, 불평등한 분배로 인식된 토지를 재분배 통해 절대 다수의 농민을 착취피착취 계급도 아닌 중농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예는 교육기회의 평준화 정책인데 열악한 교육환경속에서 자란 비도시 출신자들에게도 도시생활자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평균주의의 제도화는 권력의 분배를 통해 완전한 평균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인민의 물질적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사회질서의 혼란과 사회적 위기의 가중을 초래한 채 결국엔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등소평 정권에 이르러서는 ‘노동에 따른 분배’와 ‘상품경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고, 이는 생산의 적극성을 유도하고, 노동주체인 인간이 생산조건 향상과 노동의 강도와 시간의 증가를 가져오고, 동시에 지식과 기술수준을 제고하여 사회주의 생산력에 향상을 이끌었다. 이러한 모습은 ‘선부론’이라 불리는 ‘먼저 부자되기’의 허용으로 더욱 보편화, 가속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의 기조는 경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부가 사회적으로 본보기를 창출해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불법적비정상적인 경로통한 부 증대를 방지했고, 합리적인 수입의 분화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는데 이는 경제정책이 지역차등화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짐으로써 지역차별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중앙의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③ 반지주의(反知主義) → 존지주의(尊知主義)
중공당사의 전개과정에서 당 간부의 구성원 변화를 살펴보면 정치적 자격기준과 전문적 자격기준 간의 모순 속에 변화양상이 중국 정치문화의 일면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공산당 창설시에는 게릴라 전쟁을 주도하는 전투지도자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사상성과 더불어 업무수행 능력이 필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당 간부들을 사상성을 기준으로 뽑았고, 이들 대부분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혁명의 완성 과정에 있어서 지식인들은 불필요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그리고 공산초기시기에는 여전히 농업에 근거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 적었고, 지식인들이 오히려 사회를 무정부 상태로 만든다고 보고, 혁명을 퇴색시킬 수 있다고 보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에 대해 탄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식수준의 저하와 전문기술의 결여로 오히려 경제적 낙후성의 심화와 과학기술공업기술의 발전을 저해했다.
때문에 개혁개방정책이후 실시된 지식인에 대한 정책은 존지주의로 바뀌게 된다. 등소평이 현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전문지식을 가진 인재, 즉 테크노크라트(technorat)의 등용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삼불주의(三不主義)’에 입각한 신지식인 정책을 실시하여 지식인들의 복권과 명예 회복 조치를 단행하였고, 학위제의 부활과 해외유학의 개방을 실시하는 등 지식인층의 역할이 발휘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여 왔다. 테크노크라트의 처우개선과 충원과정의 성격은 중국사회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실용적인 사회로 변화시켜, 소외된 지식인들을 정치체제에 통합시키며, 해외로의 고급인력의 유출을 막는 등 지식인을 중시하고 있다.
Ⅱ. 제도적 측면
① 일당체제
중국에 있어서 공산당은 중국에 있어서 모든 정치권력의 원천이며, 다른 모든 조직을 통제하는 배타적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면서, 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앙 집권화를 실시하여,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반대 세력의 숙청과 사회주의 이념의 주입이라는 철저한 사상 통제를 통해 일당 체제가 강화되어 왔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기관보다 우위에 있고, 실질적인 헌법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입법, 사법, 행정 군사 등의 요직을 장악하여 모든 분야에 영향력 및 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일당체제는 개인에의 권력에 집중 현상을 가져왔고, 전통문화의 속성인 ‘인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제도화의 정착에 관한 기대에도 긍정적이지 못하게 작용하고 있다.
② 파벌정치
정치 집단에 있어서 파벌은 서로 친밀한 관계속에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적대 세력을 갖고 있는데, 중국 정치 집단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즉 혈연이나 지연, 학연 또는 공동의 경험을 매개로 한 사적 인간관계가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관계보다도 더 중요시 여긴다. 이러한 파벌정치는 유가사상에 근거한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사회구성원들간의 갈등대립투쟁을 지양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관계 문화의 소산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중국의 정치가 인치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이익이나 지위를 보호하고 향상하는데 있어서 비공식적 인적관계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도 파벌정치를 형성하는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③ 원로정치
원로정치는 수렴청정과 같은 방식으로 당이나 정부의 정책결정이나 공권력 행사에 공식적 직함없이 깊숙이 관여하는 행태를 말한다. 이는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이후에 등소평 등 혁명 2세대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게 되었는데 새로이 정권을 잡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 행사 할 수 있을 만큼 당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을 원로들과 협력과 협조를 통해서 권력 행사가 가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상황은 주요 정책결정에 있어서 원로가 정치 권력 행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원로가 공직에 있을 때에 후계자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하여, 휘하의 인물들을 포진해 놓았기 때문에 비공식적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가능게 했고, 파벌의 좌장들은 당과 정부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하기 전에 원로의 조언과 자문을 구하는 형태로 계속 되고 있다. 실제로 강택민과 등소평에 의해 당 총서기에 임명된 조자양 등의 최고 지도부들도 여전히 모든 정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공식적인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등소평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의 결정에 따랐다고 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등소평 정권에 이르러서는 ‘노동에 따른 분배’와 ‘상품경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고, 이는 생산의 적극성을 유도하고, 노동주체인 인간이 생산조건 향상과 노동의 강도와 시간의 증가를 가져오고, 동시에 지식과 기술수준을 제고하여 사회주의 생산력에 향상을 이끌었다. 이러한 모습은 ‘선부론’이라 불리는 ‘먼저 부자되기’의 허용으로 더욱 보편화, 가속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의 기조는 경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부가 사회적으로 본보기를 창출해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불법적비정상적인 경로통한 부 증대를 방지했고, 합리적인 수입의 분화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는데 이는 경제정책이 지역차등화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짐으로써 지역차별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중앙의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③ 반지주의(反知主義) → 존지주의(尊知主義)
중공당사의 전개과정에서 당 간부의 구성원 변화를 살펴보면 정치적 자격기준과 전문적 자격기준 간의 모순 속에 변화양상이 중국 정치문화의 일면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공산당 창설시에는 게릴라 전쟁을 주도하는 전투지도자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사상성과 더불어 업무수행 능력이 필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당 간부들을 사상성을 기준으로 뽑았고, 이들 대부분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혁명의 완성 과정에 있어서 지식인들은 불필요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그리고 공산초기시기에는 여전히 농업에 근거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 적었고, 지식인들이 오히려 사회를 무정부 상태로 만든다고 보고, 혁명을 퇴색시킬 수 있다고 보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에 대해 탄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식수준의 저하와 전문기술의 결여로 오히려 경제적 낙후성의 심화와 과학기술공업기술의 발전을 저해했다.
때문에 개혁개방정책이후 실시된 지식인에 대한 정책은 존지주의로 바뀌게 된다. 등소평이 현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전문지식을 가진 인재, 즉 테크노크라트(technorat)의 등용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삼불주의(三不主義)’에 입각한 신지식인 정책을 실시하여 지식인들의 복권과 명예 회복 조치를 단행하였고, 학위제의 부활과 해외유학의 개방을 실시하는 등 지식인층의 역할이 발휘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여 왔다. 테크노크라트의 처우개선과 충원과정의 성격은 중국사회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실용적인 사회로 변화시켜, 소외된 지식인들을 정치체제에 통합시키며, 해외로의 고급인력의 유출을 막는 등 지식인을 중시하고 있다.
Ⅱ. 제도적 측면
① 일당체제
중국에 있어서 공산당은 중국에 있어서 모든 정치권력의 원천이며, 다른 모든 조직을 통제하는 배타적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면서, 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앙 집권화를 실시하여,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반대 세력의 숙청과 사회주의 이념의 주입이라는 철저한 사상 통제를 통해 일당 체제가 강화되어 왔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기관보다 우위에 있고, 실질적인 헌법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입법, 사법, 행정 군사 등의 요직을 장악하여 모든 분야에 영향력 및 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일당체제는 개인에의 권력에 집중 현상을 가져왔고, 전통문화의 속성인 ‘인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제도화의 정착에 관한 기대에도 긍정적이지 못하게 작용하고 있다.
② 파벌정치
정치 집단에 있어서 파벌은 서로 친밀한 관계속에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적대 세력을 갖고 있는데, 중국 정치 집단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즉 혈연이나 지연, 학연 또는 공동의 경험을 매개로 한 사적 인간관계가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관계보다도 더 중요시 여긴다. 이러한 파벌정치는 유가사상에 근거한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사회구성원들간의 갈등대립투쟁을 지양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관계 문화의 소산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중국의 정치가 인치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이익이나 지위를 보호하고 향상하는데 있어서 비공식적 인적관계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도 파벌정치를 형성하는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③ 원로정치
원로정치는 수렴청정과 같은 방식으로 당이나 정부의 정책결정이나 공권력 행사에 공식적 직함없이 깊숙이 관여하는 행태를 말한다. 이는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이후에 등소평 등 혁명 2세대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게 되었는데 새로이 정권을 잡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 행사 할 수 있을 만큼 당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을 원로들과 협력과 협조를 통해서 권력 행사가 가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상황은 주요 정책결정에 있어서 원로가 정치 권력 행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원로가 공직에 있을 때에 후계자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하여, 휘하의 인물들을 포진해 놓았기 때문에 비공식적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가능게 했고, 파벌의 좌장들은 당과 정부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하기 전에 원로의 조언과 자문을 구하는 형태로 계속 되고 있다. 실제로 강택민과 등소평에 의해 당 총서기에 임명된 조자양 등의 최고 지도부들도 여전히 모든 정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공식적인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등소평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의 결정에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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