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물 탐구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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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인물 탐구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1

Ⅱ. 루터 당시의 세계……………………………1
 1. 정치적 환경
 2. 경제적 환경
 3. 사회-문화적 환경
 4. 종교적 환경

Ⅲ. 개혁자로서의 성장……………………………3
 1. 출생과 청소년 시절
 2. 수도원에 들어가다
 3. 루터의 영적 시험
 4. 루터의 사제 서품 및 신학 수업
 5. 개혁의 깃발을 올리다

Ⅳ. 종교개혁 운동의 확산………………………6
 1. 루터의 결혼
 2. 아우크스부르크 국회
 3. 뉘른베르크 휴전
 4. 비텐베르크 합의
 5. 루터의 죽음

Ⅴ. 루터의 저술과 논쟁…………………………8
 1. 종교개혁 3대 논문
 2.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참여 문제
 3. 토마스 뮌처와 루터
 4.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

Ⅵ. 결론…………………………………………11

본문내용

위해서 집권자들이 뮌처의 혁명을 제압한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루터는 뮌처나 농민들과 같은 광신주의자들이나 종파주의자들을 “복음 안에서 그들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뮌처의 농민전쟁 참여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한 혁명가였고 기존 질서의 사악한 악들을 제거하고 사회 조건들을 평등하게 하기 위해서 정부체제의 철저한 변혁을 추구한 급진주의자였다는 견해를 갖게 했다. 반대로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반대와 정부의 제도권 정치인들과의 연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고 정치적인 진전을 가로막은 보수주의자였다는 견해를 갖게 했다.
4.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와 루터의 노예의지론 논쟁
에라스무스는 1524년 9월에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De Libero Arbitrio)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은 루터의 사상을 공격하기 위해 쓴 논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선택(free choice)을 지지하는 성서 구절들을 증빙구절들로 제시하면서 자유의지란 ”인간 스스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들에 적용할 수 있거나 혹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의지의 능력“(a power of human will)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며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능력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는 실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유선택은 죄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의지의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죄에 대해 책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자유선택을 의미하는 수많은 구약성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구절들은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25년 12월 21일에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 제목은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이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신앙의 쓸모없고 불필요한 조항들로 간주하면서 단지 인간은 경건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루터에 의하면 은총이 없다면 인간은 악마의 포로이다. ‘자유선택’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 루터는 자유선택의 범위를 이 세상에서 행해진 결정들에만 제한시켰으며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배제시켰다. 루터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은총의 행동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구약성서가 율법과 위협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신약성서는 약속들과 훈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성령과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메시지 외에 아무것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특별히 로마서를 주로 인용하면서, 바울이 말한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은 자유 선택을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로마서 3:20 이하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통해 명백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로나 자유의지가 공헌을 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도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하나님의 전능성은 자유의지를 배제한다는 자신의 신학적인 논거들을 주장하였다.
Ⅵ. 결론
루터는 세계사를 썼다. 중요한 독일 남성들 중에서도 루터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카를 5세 앞에 나타난 것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보름스에서 의견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연설은 세계사의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인정되었고 모든 비평에서 면제되었다. ‘탑 체험’을 통한 자비롭고 의로운 하나님의 발견은 “인류의 운명의 순간”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에 대한 투쟁 선언인 ≪면죄부에 관한 95개 논제≫는 수많은 대중판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인정되고 있다.
역사학자 하인리히 폰 트라이슈케(Heinrich von Treitschke)는 1890년대 초반 그의 유명한 루터 관련 연설 <루터와 독일민족>에서 루터를 “세상의 모든 위대함과 고귀함”의 근본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동료 프리드리히 폰 베촐트(Friedrich von Bezold)는 1년 뒤 《독일 종교개혁사》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늦었지만 종교개혁은 조국에게 그 열매를 가져다주었다. 루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칸트와 괴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이센 국가의 기원이 개신교적이며 반가톨릭적이지 않았다면 우리의 새 독일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었던 변혁을 슬픔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감사와 함께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루터의 성서 번역과 루터의 언어는 독일에서 수 세기 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루터가 만든 개신교 찬송시와 교회음악은 파울루스 게르하르트(Paulus Gerhardt)와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교회음악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게다가 루터의 신학은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급진적 사고에서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올바른 신학은 루터가 제시한 기본적인 질문을 지나칠 수 없다. 이것은 분명 모든 기독교 종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근본적인 업적에 대해 루터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항상 자부심이 있었다.
최근 교회역사가 알브레히트 보이텔(Albrecht Beutel)은 루터의 사상은 “결정적으로 중세의 정신에나 근대의 정신에나 똑같이 낯설었기” 때문에 “루터에게는 특징이 결어되어” 그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 제대로 정하는 것은 오늘날 문제가 있다고 평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는데 루터는 우리에게 세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 그는 중세에 사로잡혀 있다. 즉 봉건적 계급 질서를 완고하게 고집했다. 둘째, 그는 교회의 후견과 전통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셋째, 그는 모든 시대와 일반적인 인간 사고에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의를 급진적으로 알렸다. 바로 이점에 시대를 초월한 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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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01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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