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의 대립을 넘어-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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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좌우의 대립을 넘어-조봉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과의 타협 없이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극좌파와 마찬가지로 극우파를 배제하고 중도적인 인물을 내세워 이들로 하여금 정계의 구심점을 형성하게 하고, 미소공위를 속개하여 한반도에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4개국 탁치가 실시되면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독점적 지위를 막을 수 있으며, 재정적 군사적 부담 없이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미군정이 남한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좌우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합작을 실현하여 그들 대표로 하여금 미군정에 적극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강만길 심지연 ,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서울, 도서출판 한울, 2000) pp.188-191
이에 1946년 5월 25일부터 좌우합작회의를 개최하였는데, 회의에는 김규식, 여운형을 비롯하여 원세훈, 황진남, 버치, 아펜젤러가 참석하였고 극우, 극좌인물로 지목된 김구, 이승만, 박헌영 등은 제외되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좌익진영에서 제시한 좌우합작 5원칙과 우익진영에서 제시한 8원칙을 절충하여, 동년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7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급 대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급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며 민주주의 건국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강만길 심지연 ,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서울, 도서출판 한울, 2000) p 210
그러나 이러한 절충적인 원칙이 발표되자, 좌우익은 모두 불만을 표시하였는데 특히 지주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한민당의 우익세력에게는 7원칙에서 발표한 토지개혁 안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극좌세력은 좌우합작 5원칙을 고집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민족전선에서 탈퇴하였고, 당수직도 내놓자 좌익은 철도파업을 계기로 하여 남한에서의 폭력 파괴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더욱이 여운형이 테러를 당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세력은 좌우합작에 따른 통일 정국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지 못한 채 극우 극좌의 노선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김규식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분투해 온 좌우합작은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국내정국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미소 양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른 전략적 입장만 고수함으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자 하였다. 김규식은 처음에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이 미소양군의 철수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해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48년 1월 8일 무력통일을 꿈꾸고 있던 소련과 김일성의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유엔 임시 위원회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은 한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남북의 지도자가 직접 만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회담을 갖는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2) 김규식과 남북협상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영국과 소련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협상을 할 필요가 잇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관한 북한 측의 회답이 3월 15일 평양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들은 4월 초의 남북수뇌부의 연석회의에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4월 19일 김구가 우익진영의 극렬한 반대를 무릎 쓰고 북행을 위해 서울을 떠났다. 우사는 북행에 앞서 민주국가의 건립, 사유재산 인정, 통일 중앙 정부 수립, 외국의 군사기지 반대, 미소양군의 철퇴 등 협상의 5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수용한다는 회답을 받자 4월 21일 서울을 떠나 22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김규식과 김구는 4월 19일부터 5월 4일까지 세 차례의 회담을 가졌는데 4월 30일 김규식, 김구, 허헌 등 남쪽대표 11명과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대표가 참가하여 회의를 가진 뒤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공동성명서는 원칙적으로 통일정부수립안과 그 실천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4월 26일 김규식 김구 김일성 김두봉의 4김의 4자회담을 통해 김규식은 우편물의 교환, 남한에 대한 전기의 지속적인 공급을 제안하였고, 북한 측은 이를 수용하였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미 소양군의 철수에 대해 북한 측과 일치를 보았음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정부수립 후의 미군철수를 고집하였고, 남북협상에 따른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북한은 곧바로 남한으로의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를 통한 완전한 통일정부를 수립코자 했던 김규식, 김구의 열망은 무산되고 말았다.
Ⅲ. 결론
이처럼, 김규식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좌우합작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각에서는 비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김규식이 해방 공간에서 한 행동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다. 따라서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 더불어 남북협상, 파리강화회의 참석 등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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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13.09.30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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