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저『한국기독교회사1,2』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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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영재 저『한국기독교회사1,2』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의 피가름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통과한 후 한국 교회는 진정한 재건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혹독한 고난의 시기를 통과했기에 한국 교회의 순수한 신앙이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과거의 순수했던 신앙에 비하면 배도와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께 비통하게 회개하며 돌이켜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난이 사라지면 교회는 더욱 연합할 것 같은데, 오히려 거대한 분열의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순수한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기에 무조건 부정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심정적으로는 너무도 큰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해방 후, 한국 교회 내에는 진보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 사이의 일련의 투쟁과 논쟁이 있었으며, 이것이 한국교회 대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결국 1950년대에 세 차례의 대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첫 번째 분열은 1940년 조선신학교의 설립으로 야기되었다.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는 친일파의 성격을 갖고 개교하였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을 따르는 김재준을 중심한 동 신학교는 교회 내의 갈등을 촉진시켰다. 이런 가운데 1946년 박윤선 박사를 중심으로 고려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박윤선은 구프린스턴 신학과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ICCC와의 교류로 인해 분리주의라는 비판 역시 받게 된다. 이런 가운데 조선 신학교 내에서 51인 진정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신학교의 가르침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진정을 51인의 학생이 총회에 제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박형룡 박사이다. 결국 이것을 시발점으로 기장측의 분열이 일어났다. 총회에서 권유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조선신학교에서 거부하였고, 결국 총회와 결별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분열은 고려파의 분열이었다. 신사참배 문제 청산과 관련되어 경남 노회의 문제가 일어난 가운데,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거부당하게 되고, 결국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신학교는 극단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시작하고 경남노회에서 고신대를 인준하지 않는데 이르게 된다. 결국 1952년 고려파는 독노회를 구성하고 56년에 독립하게 되었다. 세 번째 분열은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었다. WCC와 관련된 에큐메니컬 문제였다. 1956년에는 에큐메니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문제로 인해 1959년 총회에서 통합과 합동으로 교단의 분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아픈 시기에 역사라고 생각된다. 신학 사상의 문제로 야기된 기장 측의 분열은 차치하고라도, 고려파의 분열과 통합/합동의 분열은 아픈 역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분열 배후에는 정치적인 원인들도 있었겠지만,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몇몇 사람의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실수마저도 옹호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도 필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역사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이전까지 복음주의 정체성을 충실하게 견지해 오던 한국교회가 1930년에 접어들어 뚜렷한 신학적 변천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찾아온 한국교회의 신학적 변천은 해방 이후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학적 전통을 존중하려고 하는 이들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신학을 추구하려고 하는 이들과의 논쟁이 계속되면서 1950년대 한국교회가 만난 일련의 분열은 신앙의 순수성을 견지하려는 자들과 신앙의 현실성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의 시각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로,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신학적 변천과 변화는 그 이후에 찾아온 신사참배의 도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주창한 이들은 신사참배의 강요에 순교적 신앙으로 맞섰고 신앙의 변천을 추구했던 이들은 너무도 쉽게 타혐의 길로 접어 들었다. 셋째로,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복음주의 신앙과 정신, 곧 복음 전파의 순수성, 그리고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은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논제라는 사실이다.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문턱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과연 처음 전해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 복음의 순수성과 복음을 전해준 이들의 순수한 복음의 열정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걸어 온 길을 반성하고 앞으로 방향성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정체성 파악의 시대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일련의 분열을 경험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는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면서 전통적인 기독교를 이 시대에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1960년 이후 한국교회의 역사는 현대 문화 사회에 기독교를 조정하려는 토착화,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자들과 전통적인 신앙과 신학을 지키면서 복음 본영에 충실하려고 하는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전개된 교회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토착화운동, 복음주의운동과 국내외선교운동이 맥락을 같이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60년대 이후, 아니 현대교회에서는 한국교회가 뚜렷한 분기점을 이룩하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때, 다시 한번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 해 본다. 교회가 깨어나는 길은 오직 영적 각성밖에 없다. 우리는 작금의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고, 교회가 영적으로 재무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며, 신앙의 선배들과 선교사들의 순교자적 정신을 이어 받아 이 민족과 세계 열방을 품고 복음 전하는 일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영적 각성운동으로 대변되는 부흥운동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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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1.13
  • 저작시기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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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5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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