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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위에 서는 것이다. 조조란 인물은 그러한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며, 그가 최근 처세학 분야에서 유달리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그러나 또 한편으로, 조조가 보여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몇 가지 복합적인 면모들의 혼합이다. 이는 최근의 “무기력한 자유시민” 테제와 그 연관성을 보인다. 현대 사회는 정보의 절대적인 양에 있어서는 비대해졌지만, 오히려 그 정보를 만들고 이용하는 등의 활기에 있어서는 기존과 비교하여 더 저하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위 무기력증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뭔가 모험을 치르고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시류에 따르면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 강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그저 이끌어주기만을 바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취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공무원과 같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추구하는 경향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며, 그러한 속에서도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하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도 이러한 속에서 해석하면 어느 정도 일치한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이러한 측면에서 조조라는 인물은 더욱 부각된다. 유비의 밑에서는 뭔가를 해야 하지만, 조조라면 그들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이끌어나갈 것이다. 자신들이 하기보다 누군가 이끌어주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유비보다는 조조를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현재의 조조라는 인물의 부각은 이러한 능력을 바라는 자본주의적 경쟁사회라는 측면과, 강한 리더십 도래를 바라고 있는 현대 사회의 무기력증이 교묘하게 연합되어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III. 결문매체는 당시 시대를 반영한 산물이다. 당시 시대의 관심사, 당시 시대의 가치관 등이 그 시대의 매체에서 드러나고는 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 일어난 인간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미술에 표정과 동적인 움직임들을 부여했고, 동아시아 서민들의 불만과 새로운 시대와 영웅들에 대한 열망은 중국의 『수호전』, 한국의 『홍길동전』과 같은 작품들로 표출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당시 발생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는 신문기사와 같은 매체들을 치하더라도, 처세나 경영 관련 서적들의 대량 출판과 판매, 조금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팬터지 소설들의 엄청난 인기들이 이러한 모습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그러나 반대로, 매체는 세계의 변화를 위한 도구로 자주 활용되기도 한다. 남북전쟁 당시 스토 여사의 책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지금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면에 한정하더라도,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이순신, 계백 등의 인물들을 강조하며 국가 이데올로기를 형상화하고 프로파간다했다는 것은 상당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한 일본도 메이지 유신 시대 천황 이데올로기를 프로파간다하기 위해 남북조 시대의 명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같은 인물들을 강조, 그를 모시는 신사를 짓고 그의 동상을 세우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삼국지란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은 상당히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유비와 조조의 대비와 같은 측면에서는, 이 시대의 관심사, 가치관 등을 투영할 수 있는 인물로 조조가 부각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실제로 과거 유비가 강조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반면 관우에서 조운으로 넘어간 구도는, 단순히 시대의 반영이란 측면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 관우와 조운이 보여주는 두 다른 개념의 충의 중에서, 현대 사회가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낫겠다는 식의 강요를 가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애초에 충의란 개념 자체가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이입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란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문학 텍스트의 역사적, 사회적 이해라는 행위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상당수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정확한 분석이라 볼 수도 없고, 그 해석자나 해석 당시의 정황 등에 의해 다시 또 왜곡이 벌어질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 없이 그저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라면, 그러한 텍스트의 파악은 단지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중학교 교과서에 문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실리는 이 시점에, 우리 또한 그러한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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