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와 세계대공황 {대공황의 배경,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일반이론, 대공황의 원인, 대공황의 타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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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금본위제와 세계대공황 {대공황의 배경,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일반이론, 대공황의 원인, 대공황의 타계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대공황의 배경
 1. 1차 세계대전의 영향
 2. 물가앙등과 초 인플레이션
 3. 1920년대 국제자본이동
 4. 1920년대 농업위기
 5. 유럽 은행시스템의 안정과 위기

Ⅲ.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일반이론
 1. 유효수요설에 따른 대공황의 원인
 2. 통화설을 주장하는 테민의 입장에서 본 대공황의 원인
 3. 절충론을 선호하는 학자의 입장

Ⅳ. 대공황의 원인
 1. 미국의 대공황
 2. 구조적 불균형과 리더쉽의 부족
 3. 국제협력의 부재
 4. 금본위제의 재건 및 유지를 위한 긴축정책

Ⅴ. 대공황의 타계책
 1. 미국의 뉴딜정책
 2. 영국과 스털링지역
 3. 금블록
 4. 나찌 무역지역
 5. 국제적 대책과 효과

Ⅵ. 결 론

본문내용

프랑스와 금블록에 남아있는 회원국들은 금본위제를 고수하느라 불황을 완화하는데는 속수무책이었다.
4. 나찌 무역지역
독일에서는 1933년 1월 히틀러와 나찌당이 정권을 잡았다. 외환통제, 고용창출계획, 은행에 대한 정부개입, 농업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 나찌 정책의 많은 부분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 받았다. 독일은 항상 정부가 경제 및 대외무역정책에 고도로 개입했었다. 그러나 나찌는 외환 및 무역통제를 포함한 경제통제에 강제로 순응시키기 위하여 테러 즉 강제수용소행과 사형도 불사하는 위협수단을 썼다.
1930년대의 세계무역은 독일의 경우 금과 마르크에 대한 스털링과 달러의 평가절하, 보호주의 대두, 박해를 피하여 탈출한 유태인들로 인해 초래된 자본유출, 나찌 정책에 대한 국내외적 대응 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단기적으로 1934년에 외환을 더욱 통제하고 해외채무 이자의 지불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장기전략은 제국은행의 총재이자 재무장관인 샤흐트의 ‘신계획’으로 고안되었다. 그것은 수입 제한 방식으로 경제적 자급자족을 촉진하였고 무역을 행정적으로 더욱 통제하기 위하여 상품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였다. 1935년 마르크화의 과대평가로 세계시장에서 독일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자 수출 보조금 지불 계획이 시작되었다.
자급자족으로 향하는 나찌의 무역정책은 서방경제들 사이에서 독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시경제를 준비하는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목표에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 군사적 준비와 국내인구에 대한 행정적 통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지불한 대가는 가용한 수입품 감소와 노동집약도 증가였다.
5. 국제적 대책과 효과
프랑스 프랑의 가치가 하락하고 민주주의 진영에서 정치적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프랑스, 영국, 미국은 보다 협조적인 국제적 틀을 형성하기 위하여 마지못해 몇 가지 제한적이고 실험적 조치를 취했다. 삼국협정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협정은 금본위제가 국제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확연하게 했다. 이러한 최소한의 협정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복잡한 협상이 필요했으며, 이것은 만신창이가 된 국제조직의 유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부분적 협력은 커다란 갈등을 동반하면서라도 가능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제적 논의에 관심도 없었고 초청되지도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은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리더쉽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루즈벨트 집권 하의 미국은 국내 정책 위주로 전환하면서 협력의 기회보다는 오히려 협력의 장애물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협정으로 경쟁적 평가절하는 피했다. 전쟁 발발 전의 길지 않은 기간동안 통화 흐름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1936년 9월 프랑스에 이어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다. 이로서 금블록은 출범한 지 3년 만에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벨기에의 경우처럼 이 두 나라의 회복 속도도 빨라졌다. 수출시장이 회복되고 팽창정책이 실시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스의 평가절하를 구실로 리라를 평가절하하고 외환통제를 완화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크라운을 다시 평가절하했다. 프랑스에서는 삼국협정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블륑정부가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으로, 국제적 동의는 프랑스의 평가절하를 숨기기 위한 속임수로 간주되었다.
Ⅵ. 결 론
지금까지 대공황의 배경, 원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결론에서는 그 대강을 요약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중부와 동유럽 몇 지역에서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로 인해 자국 화폐의 대외적 가치 하락을 경험했다.
전후 짧은 호황 이후 경기는 침체되었고, 많은 나라가 1920-21년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과 금융위기, 연합국간의 엄청난 채무부담, 그리고 독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려는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들의 집착은 전쟁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채무관계에 대처해 가는 과정은 1920년대 금융불안정을 야기한 결정적 요인가운데 하나였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금융계와 정치권에 널리 퍼져 있던 금본위제(金本位制)로 복귀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 결과 많은 중부 및 동부 유럽국가의 통화정책은 모두 금본위제의 재건에 맞추어져 있었다.
금본위제의 해체와 국제적 통화협력의 단절로 세계는 여러 개의 적대적 경제권역으로 나뉘어 스털링 지역, 금 블록, 나찌 독일 지배하의 국가군 사이의 정치적경제적 경쟁으로 치달았다. 이 시기에는 통화의 연쇄적 평가절하, 외환통제 도입, 다양한 형태의 무역장벽의 설치라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평가절하로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통화 팽창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5-6년간 무역증가와 급속한 성장 및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은 그 기간 동안 깊은 침체와 더딘 회복 속에 있었다. 미국은 1933년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실시로 금태환 정지와 1934년초 달러의 평가절하 후 급속한 회복을 시작했다. 계속 금본위제를 고집하고 있던 나라들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1931년 이전과 같은 수준의 금평가(金平價)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점점 실현 불가능하게 되어 금 블록 국가들도 마침내 평가절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협정으로 프라스, 영국, 미국은 외환통제 조치를 완화하고 경쟁적 평가절하를 자제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 틀 밖에 있었는데,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국 경제를 점점 국가통제, 군국주의, 폐쇄경제의 방향으로 몰고 갔으며 외환통제, 관세, 그리고 쌍무무역협정의 그물망 속에 중부유럽과 남동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였다.
【참고문헌】
♣ 찰스 페인스틴, 피터 테민, 지아니 토니올로,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역, 동서문화사, 2001.
♣ 찰스 P.킨들버거, 『대공황의 세계』, 박명섭 역, 부키, 1998.
♣ 디트마르 로터문트,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역,
예지, 2003.
♣ 피터 테민, 『세계 대공황의 교훈』, 이헌대 역, 해남,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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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3.29
  • 저작시기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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