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랑 사회 E형]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 잘 다뤄지지 않거나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회 집단을 골라 그들의 삶 속에서 성차별과 다른 사회적 격차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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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랑 사회 E형]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 잘 다뤄지지 않거나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회 집단을 골라 그들의 삶 속에서 성차별과 다른 사회적 격차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방통대 공통학과 4학년 성 사랑 사회 E형]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 잘 다뤄지지 않거나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회 집단을 골라 그들의 삶 속에서 성차별과 다른 사회적 격차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서술하시오.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위안부의 개념
1) 위안부의 용어 정의
2) 위안부의 부당성
(1) 민족의 문제
(2) 성의 문제
(3) 계급의 문제
(4) 인종 차별의 문제
2. 위안부의 역사
1) 위안부 발생배경
2) 위안부의 충원
3) 당시 위안부의 삶
3. 위안부의 성차별과 다른 사회적 격차와의 관련성
1) 성적인 노예계급
(1) 강제매춘이나 공창제도와의 관계
(2) 여성에 대한 국가 폭력
2) 민족 차별
(1) 일본어와 일본 이름의 강요
(2) 민족별 차별
(3) 패전 이후 위안부 방치
4. 위안부 문제의 본질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3) 패전 이후 위안부 방치
피해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조선인 여성은 패전 사실을 듣지 못한 채 현지에 유기(방치)당한 예가 많았다.
고국은 피해자들을 받아주었을까? 해방 직후의 신문에 고국으로 귀환을 마친 위안부의 소식이 게재되었다. 이에 의하면 중국 상하이에서 동포 유지인 공돈 등이 한국부녀구제회를 결성하여 1545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1214명의 위안부 여성들을 수용하고, 이듬해 1946년 4월까지 전원 귀국시켰다고 한다. 꽃다운 우리 동포의 부녀들은 소위 정신대라 위안부라는 미명 아래 왜병놈의 싸움터로 끌려가 가진 유린 과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위안부(정신애)라는 용어가 쓰이고 일본군에 의해 유린과 혹사를 받은 피해자로 표상되고 있는 점에 주목을 해야 한다. 아무튼 일본군은 일본인 위안부를 귀국시켰지만 스스로 입안 실행한 위안부 제도에 의해 조선에서 전장으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를 귀국시킬 어떠한 방법도 취하지 않았다.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전후 책임의 방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의 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까지 일본 정부와 사회는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 묵살했다. 일본 정부가 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91년 8월에 김학순 씨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명으로 얼굴을 공개하고 증언을 시작했고 1992년 1월에 군이 관여한 자료가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본 정부는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 생활자들에 대해 아무런 귀국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한 것이다.
전후 보상에 관한 것은 어떠한가? 일본 정부의 전후 보상정책으로는 전 군인, 군속이었던 일본인 남성에 대해 국가보상의 정신에 기초하여 개인보상(군인은급)이 1952년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비해 위안부에게는 일본 정부에 의한 개인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5년에 일본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소위 아시아여성기금)을 창설하였으나 이것은 민간의 모금에 의한 위무금이지 국가보상이 아니다. 여기에도 일본인과의 현저한 격차가 있다. 전후 보상도 방치된 것이다.
4. 위안부 문제의 본질
일본정부는 193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아태지역 식민통치 기간 동안 위안부로 알려져 있는 젊은 여성들을 오로지 일본 황군의 성 노예로 삼기 위해 공식적으로 징집하였다. 위안부 여성들은 13세 소녀들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헤어져 온 여성들까지 포함하였으며, 자신들의 집에서 납치되었거나 사기에 의해 성노예로 종사하도록 유인되었고, 적대행위가 끝나자 다수의 위안부 여성들이 결국 사살되거나 자살을 하도록 종용받았다.
위안부 제도는 일본정부에 의해 강요된 군 매춘으로써 잔혹성이나 규모면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며 집단강간, 강제낙태, 모욕, 신체장애, 사망, 자살에 이르게 하는 성폭력이 자행되었는바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일본 내 일부 신규 교과서는 위안부 여성의 비극과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관리들은 최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참회를 담은 1993년 Kono 관방장관의 담화를 희석시키거나 폐기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고 ‘그런 적 없다.’ 또는 ‘인격적인 대우와 함께 합법적인 운영이었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의 인권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Ⅲ. 결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설치, 운영한 종군위안부제도가 전쟁범죄임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일본정부에게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의 10~20만 명을 국가 제도로 기획 입안하여 조직적으로 강제 연행, 납치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든 세계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잔악한 범죄이다. 일본은 범죄를 인정하고 진상규명하며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를 바로 잡는 문제와 동시에 미국이 아닌 한국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짓밟힌 여성들의 인권 회복이며, 한일간의 역사 왜곡을 바르게 하는 일이고 일본의 군국주의 재등장을 방지하여 아시아와 세계 평화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한명의 인권이 짓밟혀도 세계에서는 그 나라에 전면 대응하고 국가와 국가의 최고 권위자의 사과를 받아내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라 해도 10~20만 명의 인권이 짓밟힌 역사를 지금도 어떠한 사과의 언급은커녕 무시하고 내몰고 부인만 하는 국가에게 정의와 의가 있겠냐 만은 또 그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가슴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자숙의 목소리의 사과가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세계의 이목에 어쩔 수 없는 사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 하나만이라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범죄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우에노 지즈코, 이선이 옮김(2014)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 다시 쓰는 <내셔널리즘과 젠더>, 현실문화
스즈키 유코, 이선이 옮김(2013)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젠더, 나남
정진성(2006) 일본군 성 노예제, 서울대학교출판부
정경아(2006) 위안부리포트(나는 고발한다), 길찾기
정대협(200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도츠카에츠로(2004)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이다, 소나무
문영숙,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 부산 : 동아대 동북아국제대학원, 2005
정구선, 중국으로 끌려간 우리 여인들의 역사-공녀, 국학자료원, 2002
정대협, 왜 우리는 지금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가, 정신대자료집, 1992
한국정신대연구회, 한일간의 미청산과제, 아세아문화사, 1997
정대협, 국회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모임 편, 여성과 인권관련 UN자료정집,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8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9
김부자, 한일 간 역사현안의 국제법적 재조명, 조선인 위안부 전시동원 -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다시 생각한다, 한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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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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