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현제는 누구인가 [출현 배경 및 당시 로마의 상황, 국제적 정세, 네르바 - 혼란의 종식, 트라야누스 - 지고의 황제, 하드리아누스 - 로마 평화와 제국의 영원, 안토니누스 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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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현제는 누구인가 [출현 배경 및 당시 로마의 상황, 국제적 정세, 네르바 - 혼란의 종식, 트라야누스 - 지고의 황제, 하드리아누스 - 로마 평화와 제국의 영원,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5현제의 치적
Ⅲ. 5현제 이후의 로마
Ⅳ. 부록
참고문헌

본문내용

쿠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왜 공동 통치자로 승격시켰을까. 이 문제의 본질은 그의 철학적 사유를 위한 여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 크리스의 견해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 내내 로마에는 홍수와 기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치열한 전투는 대 파르티아 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르티아의 도발은 아르메니아 침략 및 종속국화, 이어지는 시리아 군단 격파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황제 두 명 모두 동방 전선으로 친히 참전하여 아르메니아 수도 아르탁사타를 점령하고, 이어서 크테시폰마저 점령한 후에 왕궁을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이 때 가져온 전리품은 전염병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A.D.167년에는 참담한 상황을 연출하였으며, 도나우 강 게르만 족들의 흥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의 침입에 맞서서 2인 황제는 다시 북쪽으로 친히 원정을 가서 속주 문제를 해결하였다. 돌아오던 겨울에 베루스가 중풍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대 파르티아 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루키우스의 면모는 혹평으로 가득하다. ≪로마황제열전≫에서는 그를 축제와 사냥에 열중한 나머지 전쟁지휘를 제대로 못한, 나태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군주로 묘사했으나, 저자 크리스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저자는 베루스는 성군으로도 폭군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면서, 악덕이나 덕목 모두 많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다시 말해 평범한 군주였는데, 마르쿠스의 위대함이라는 그늘 아래 가려졌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고 여겨진다.
루키우스 사망 이후 A.D.175년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확정하였다. 마녀사냥 식의 색출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모든 반란을 잠재울 조치를 취했던 모양이다. A.D.176년 돌아온 마르쿠스는 개선식을 한 후 기념 원기둥을 세웠다. 대 콰디족 원정 역시 마르쿠스는 친정하였으나, 병세는 심해졌다. 그의 죽음에 북부 전쟁이 중단되고 속주들이 포기되었으나, 그의 위대한 유산 <명상록>은 현전하고 있다.
Ⅲ. 5현제 이후의 로마
위대했던 현제의 세기는 지났다. 과거 로마 대제국의 광영을 사그라뜨린 것은 마르쿠스가 지목한 후계자인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시초였다. 그는 이른바 ‘검투사 황제’였다. 그는 출생과 관련한 신화에서 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도 피를 못 속였던 모양인지 콤모두스는 지나치게 검투 시합에 집착했다. 그는 야수 한 마리를 죽이기 전까지는 아침식사를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A.D.180년 즉위할 때 18세에 불과했으나, 아버지의 모범적 통치는 따르기 힘든 본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서, 과대망상증 환자로 취급되었다. 그리스 신 헤르쿨레스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를 없애려는 음모를 겪으면서 두려워진 콤모두스는 대중앞에 서기를 피했고, 페렌니스에게 전권 위임하면서 제국은 위기로 치닫게 된다.
Ⅳ. 부록
ⅰ. 연표
96(기원후)
네르바 즉위
97
트라야누스 입양, 후계자 선포
98
트라야누스 즉위
101-102
1차 다키아 전쟁
105-106
2차 다키아 전쟁
109
욕장 헌납
112
포룸, 바실리카 울피아 헌납
113
원기둥 헌납, 동방원정 출발
114
파르티아 전쟁, 아르메니아 정복
115
메소포타미아 침공
116
크테시폰 함락
117
유대 인 반란, 하드리아누스 즉위
121
갈리아 1차 대순방
125
티볼리 황궁 건축 시작
128
2, 3차 대순방
130
예루살렘 식민지 건설
132
유대인 반란
134
반란 진압
138
안토니누스 피우스 즉위
140
파우스티나 황후 사망
142
브리타니아 승리
145
마우레타니아 전쟁
152
이집트 반란(곡물 공급 위협 받음)
160
아프리카 교전
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 즉위, 콤모두스 출생
162
파르티아 전쟁 발발
165
크테시폰 함락
168
북부 국경 원정
169
루키우스 사망
170
1차 게르마니아 전쟁
175
카시우스 반란
176
파우스티나 황후 사망
177
콤모두스 공동 황제 임명
178
2차 게르마니아 전쟁
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ⅱ. 로마황제 명칭
1. 카이사르(Caesar)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을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황제가 세습한 것을 기원으로 해 \"황제\"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어 짜르의 어원이 되었다.
2. 아우구스투스(Augustus)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붙인 칭호로, \'위엄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3. 임페라토르(Imperator)
공화정 로마에서 2개군단을 지휘하는 군사 지휘권(임페리움, Imperium)을 가진 자를 부르는 말로 번역하면 \"총사령관\"인데, 이후 황제들에게 로마 제국 군수권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황제들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
4. 프린켑스(Princeps)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고 병사들의 신망도 크지 않아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낼 것을 염려, \'제1시민\'이라는 의미인 이 호칭을 만들어 사용했고, 이것이 후에 퍼져 황제라는 의미가 되었다.
ⅲ. 참고문헌
『로마인이야기 9.현제의세기』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2000. 한길사.
『로마 황제』크리스 스카레 지음. 윤미경 옮김. 2004. 갑인공방.
『로마 제국사』인드로 몬타넬리 지음. 김정하 옮김. 1998. 까치글방.
『로마 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2004. 청미래.
※ 사진 자료 : 네이버, 다음, 구글 등 이미지 검색
ⅳ 5현제 시대 영토
북쪽 경계 : 안토니누스 방벽, 다키아 북쪽 끝
남쪽 경계 : 아틀라스 산, 북회귀선 (남북 2천마일 마일(mile) ; 1mile ≒ 1.609km
)
동쪽 경계 : 유프라테스 강
서쪽 경계 : 대서양 (동서 3천마일)
지리적 온대지방 가장 살기 좋은 북위24도~56도, 총면적 : 160만 제곱마일(410만 제곱킬로미터) 대부분의 영토가 비옥한 농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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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6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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