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은 불법적인 것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이다. 1961년 제정된 70여 인종차별법규를 중심으로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을 실시했으나 그후 서서히 개혁이 이루어졌다. 1981년 헌법개정으로 대통령이 지명하는 사람으로 구성되는 대통령평의회가 설치되었다. 이 평의회에는 소수였으나 혼혈인·인도인을 포함시켜 부분적으로 이들의 정치참여를 부활시켰다.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로 가결되었고 새 대통령에 총리 P.W.모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혁은 1989년 총선으로 집권한 대통령 드클레르크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90년 2월 ANC의 의장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고 흑백분리법이 폐지되었으며, 1991년 인종차별정책의 근간법인 인구등록법의 폐지가 의회를 통과했고, 신헌법제정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평화협상이 좌초되기도 했지만,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6년 의회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비롯한 인권보장 측면이 강조된 신헌법을 채택하여 1997년 2월부터 부분적으로 발효되기 시작하였고 1999년 6월 완전 발효되었다. 1999년 6월 2일 총선에서 ANC가 승리하였으며, 6월 14일 대통령 선거에서 음베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외교적 경향은 통치계급의 성격상 친서방적이었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강화되고 1974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 축출되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1986년 미국 의회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제재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988년 UN 총회에서도 제재를 결의하자 국제적 고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994년 5월 신정권 탄생 후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아프리카통일기구), 비동맹제국회의, SADC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ordination Conference:남아프리카개발협력회의)에 가맹하고 영국연방에도 재가맹하였으며, UN 총회의 의석을 20년 만에 회복하였다. 미국·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등도 경제제재를 해제하였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총병력은 상비군 7만 5479명, 예비군 60만 5185명이다.
[주민구성]
남아프리카의 주민 구성은 특수하여 백인과 비(非)백인으로 대별된다. 백인은 10%를 차지하며 네덜란드계, 영국계, 프랑스계, 독일계 등이 있고, 비백인은 반투족(아프리카 흑인), 아시아인(인도인·파키스탄인), 컬러드(colored:각종 혼혈인, 호텐토트, 부시먼, 말라야인, 인도네시아인 등)로 나뉜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보어인(人)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으로서 그들의 후손이 현재 아프리카인이며, 영어 외에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아프리칸스어(語)를 사용하고 있다. 반투족은 부족에 따라 호사(Xhosa), 줄루(Zulu), 츠와나(Tswana), 바페디(Bapedi), 소토(Sotho)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컬러드는 아프리카인과 초기의 백인 이민의 혼혈족·호텐토트족 등의 후손들인데 주로 케이프주(州)에 거주한다. 아시아계는 19세기에 사탕수수 재식농업 노동자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주로 나탈주(州)에 거주한다. 종교는 신교도(66%), 가톨릭교도(9%)가 대부분이고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토착신앙을 믿는 주민도 있다. 언어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외에 9개 흑인 부족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 요약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에게도 정치 참여권을 부여한 일.
언제 : 1993년 12월 7일
어디서 : 남아프리카공화국
누가 : 드클레르크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무엇 : 인종 차별정책 폐지
어떻게 : 흑인들의 정치참여 허용
왜 : 흑인의 인권존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61년 5월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면서 수립되었으나, 이 지역의 백인 통치는 17세기 중엽 백인 이주자들이 케이프타운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투쟁(보어전쟁)을 거쳐 영국이 남아연방을 구성, 자치령으로 삼았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하기까지 백인에 의한 흑인 지배는 계속되었다. 특히 영연방 탈퇴 후에는 국제적 여론을 무시한 채 70여 인종에 대한 차별 법규와 흑인 자치주를 만들어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대해 흑인들은 종족별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인카타 자유당(IFP) 등을 결성해 저항했는데, 특히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이끄는 N.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제적 여론에 밀린 백인 정권은 1983년 처음으로 유색인종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84년에는 흑인 이외의 유색인종에게 투표권을 준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였는데, 1989년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 국민당의 M.드클레르크(Michael de Klerk) 대통령이 인종 차별 정책 완화의 일환으로 27년간 수감 중이던 N.만델라를 석방하고, 흑백 분리법을 폐지하는 한편 과거 백인으로만 구성되었던 국민당에 흑인의 입당을 허용하였다. 1991년 6월에는 인종차별 정책의 근간법이 되었던 인구 등록법을 폐지, 남아공화국 인종차별 정책의 종지부를 찍었다. 흑백 양대 보수세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M.드클레르크와 N.만델라가 함께 추진한 흑인의 정치참여 문제도 급속히 진전되었다. 1993년 7월에는 남아공의 주요 정파들이 흑백을 막론하고 1인 1표를 행사하는 총선거를 다음해에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12월에는 총선 때까지 행정을 담당하고 총선을 감시할 다인종 과도행정 위원회(TEC)를 출범시킴으로써 340여 년에 걸친 백인 통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1994년 4월 총선에서 N.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압승을 거두어 의장인 N.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은 명실공히 종식되었고, 총선을 계기로 인종 차별의 수단이었던 10개 흑인 자치주도 소멸되었다. 1993년 M.드클레르크와 N.만델라에게는 인종차별 정책을 소멸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혁은 1989년 총선으로 집권한 대통령 드클레르크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90년 2월 ANC의 의장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고 흑백분리법이 폐지되었으며, 1991년 인종차별정책의 근간법인 인구등록법의 폐지가 의회를 통과했고, 신헌법제정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평화협상이 좌초되기도 했지만,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6년 의회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비롯한 인권보장 측면이 강조된 신헌법을 채택하여 1997년 2월부터 부분적으로 발효되기 시작하였고 1999년 6월 완전 발효되었다. 1999년 6월 2일 총선에서 ANC가 승리하였으며, 6월 14일 대통령 선거에서 음베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외교적 경향은 통치계급의 성격상 친서방적이었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강화되고 1974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 축출되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1986년 미국 의회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제재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988년 UN 총회에서도 제재를 결의하자 국제적 고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994년 5월 신정권 탄생 후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아프리카통일기구), 비동맹제국회의, SADC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ordination Conference:남아프리카개발협력회의)에 가맹하고 영국연방에도 재가맹하였으며, UN 총회의 의석을 20년 만에 회복하였다. 미국·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등도 경제제재를 해제하였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총병력은 상비군 7만 5479명, 예비군 60만 5185명이다.
[주민구성]
남아프리카의 주민 구성은 특수하여 백인과 비(非)백인으로 대별된다. 백인은 10%를 차지하며 네덜란드계, 영국계, 프랑스계, 독일계 등이 있고, 비백인은 반투족(아프리카 흑인), 아시아인(인도인·파키스탄인), 컬러드(colored:각종 혼혈인, 호텐토트, 부시먼, 말라야인, 인도네시아인 등)로 나뉜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보어인(人)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으로서 그들의 후손이 현재 아프리카인이며, 영어 외에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아프리칸스어(語)를 사용하고 있다. 반투족은 부족에 따라 호사(Xhosa), 줄루(Zulu), 츠와나(Tswana), 바페디(Bapedi), 소토(Sotho)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컬러드는 아프리카인과 초기의 백인 이민의 혼혈족·호텐토트족 등의 후손들인데 주로 케이프주(州)에 거주한다. 아시아계는 19세기에 사탕수수 재식농업 노동자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주로 나탈주(州)에 거주한다. 종교는 신교도(66%), 가톨릭교도(9%)가 대부분이고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토착신앙을 믿는 주민도 있다. 언어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외에 9개 흑인 부족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 요약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에게도 정치 참여권을 부여한 일.
언제 : 1993년 12월 7일
어디서 : 남아프리카공화국
누가 : 드클레르크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무엇 : 인종 차별정책 폐지
어떻게 : 흑인들의 정치참여 허용
왜 : 흑인의 인권존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61년 5월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면서 수립되었으나, 이 지역의 백인 통치는 17세기 중엽 백인 이주자들이 케이프타운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투쟁(보어전쟁)을 거쳐 영국이 남아연방을 구성, 자치령으로 삼았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하기까지 백인에 의한 흑인 지배는 계속되었다. 특히 영연방 탈퇴 후에는 국제적 여론을 무시한 채 70여 인종에 대한 차별 법규와 흑인 자치주를 만들어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대해 흑인들은 종족별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인카타 자유당(IFP) 등을 결성해 저항했는데, 특히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이끄는 N.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제적 여론에 밀린 백인 정권은 1983년 처음으로 유색인종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84년에는 흑인 이외의 유색인종에게 투표권을 준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였는데, 1989년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 국민당의 M.드클레르크(Michael de Klerk) 대통령이 인종 차별 정책 완화의 일환으로 27년간 수감 중이던 N.만델라를 석방하고, 흑백 분리법을 폐지하는 한편 과거 백인으로만 구성되었던 국민당에 흑인의 입당을 허용하였다. 1991년 6월에는 인종차별 정책의 근간법이 되었던 인구 등록법을 폐지, 남아공화국 인종차별 정책의 종지부를 찍었다. 흑백 양대 보수세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M.드클레르크와 N.만델라가 함께 추진한 흑인의 정치참여 문제도 급속히 진전되었다. 1993년 7월에는 남아공의 주요 정파들이 흑백을 막론하고 1인 1표를 행사하는 총선거를 다음해에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12월에는 총선 때까지 행정을 담당하고 총선을 감시할 다인종 과도행정 위원회(TEC)를 출범시킴으로써 340여 년에 걸친 백인 통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1994년 4월 총선에서 N.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압승을 거두어 의장인 N.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은 명실공히 종식되었고, 총선을 계기로 인종 차별의 수단이었던 10개 흑인 자치주도 소멸되었다. 1993년 M.드클레르크와 N.만델라에게는 인종차별 정책을 소멸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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