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안토니에게서 출발되는 이집트 사막교부들이 수도원 운동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해 보고, 그 영성의 세계를 금언집에 비추어 논술해 보시오.
2. 에바그리우스의 수도원 신학을 그 오리겐주의적 배경에 근거하여 설명하시오. 특히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정욕의 극복에 대한 정화의 길로서의 실천학, 그 목표로서의 그노시스에 대해 논술하고 비판적으로 논평해 보시오.
3. 파코미우스의 공주수도회의 역사적인 발전과 그 영성의 특징들을 해명해 보시오. 오늘날 운둔수도와 공주수도가 가지는 의미들을 평가해 보시오.
2. 에바그리우스의 수도원 신학을 그 오리겐주의적 배경에 근거하여 설명하시오. 특히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정욕의 극복에 대한 정화의 길로서의 실천학, 그 목표로서의 그노시스에 대해 논술하고 비판적으로 논평해 보시오.
3. 파코미우스의 공주수도회의 역사적인 발전과 그 영성의 특징들을 해명해 보시오. 오늘날 운둔수도와 공주수도가 가지는 의미들을 평가해 보시오.
본문내용
서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게 내놓아야 했다. 노동을 통해 얻어진 대가도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것이었다. 이러한 공동 생산 방식 및 소유의 공동 분배는 파코미우스가 처음부터 그의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초대 교회 방식의 진정한 친교(Koinonia)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운동은 평신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안수 받는것을 용인하지 않았는데 사제직은 수도자의 공동생활 안에 다툼과 시기, 경쟁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이유였다.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금욕주의 영성이 공헌한 바는 크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릴 때에는 교회를 갱신하는 힘으로 작용했으며, 교회의 학문과 신학의 발전 및 영성을 계발하는데도 크게 이바지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갱신과 영성의 회복을 위해 이러한 수도원적 영성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비록 수도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수도사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청빈함과 복음적이고도 단순한 삶을 볼 때 그가 충실한 수도자적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청소년기에 6년 동안 카두시아 수도원 학교에서충실한 수도사 생활을 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이끌었던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 클럽도 수도원 영성을 대학에 적용한 예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한국교회가 앞으로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참된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막교부의 금욕주의 영성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이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 교훈을 오늘날에 되살려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영성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물론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불편하게 느껴질수 있다. 이는 단지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시대와 문화의 간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 깊이 그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것은,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이 순수한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신앙도 어느새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의 가치와 패러다임에 교회와 신앙인들이 장단을 맞추고있는 오늘의 현실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누리며 병들어가는 줄 모르던 유럽 중세교회의 모습과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것 같다.
교회가 인간 중심의 도시의 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사막의 영성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신앙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금욕주의의가 지향하는 주제는 세상에 대해서는 잃고, 죽는 대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얻고 사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한시적인패러다임에 대해 깊이 절망하였고 하늘의 영원한 패러다임을 열렬히 사모하였기 때문에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세상에 얽매인 욕망과 헛된 가치들을 포기하였을 때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었으며, 날마다 그러한 목표를 향해 묵묵히 수도의 길에 정진한 사람들이었다. 진실로 그들은 종말론적인 견지에서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토니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했고 덕의 길에 이미 들어섰으니 앞에 있는 것을 향해 곧장 나아갑시다.” 라고 자신 있게 권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과 같은 순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구원의 완성을 향한 영적 순례의 여정을 떠날 차례이다.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금욕주의 영성이 공헌한 바는 크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릴 때에는 교회를 갱신하는 힘으로 작용했으며, 교회의 학문과 신학의 발전 및 영성을 계발하는데도 크게 이바지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갱신과 영성의 회복을 위해 이러한 수도원적 영성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비록 수도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수도사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청빈함과 복음적이고도 단순한 삶을 볼 때 그가 충실한 수도자적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청소년기에 6년 동안 카두시아 수도원 학교에서충실한 수도사 생활을 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이끌었던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 클럽도 수도원 영성을 대학에 적용한 예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한국교회가 앞으로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참된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막교부의 금욕주의 영성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이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 교훈을 오늘날에 되살려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영성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물론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불편하게 느껴질수 있다. 이는 단지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시대와 문화의 간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 깊이 그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것은,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이 순수한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신앙도 어느새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의 가치와 패러다임에 교회와 신앙인들이 장단을 맞추고있는 오늘의 현실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누리며 병들어가는 줄 모르던 유럽 중세교회의 모습과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것 같다.
교회가 인간 중심의 도시의 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사막의 영성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신앙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금욕주의의가 지향하는 주제는 세상에 대해서는 잃고, 죽는 대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얻고 사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한시적인패러다임에 대해 깊이 절망하였고 하늘의 영원한 패러다임을 열렬히 사모하였기 때문에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세상에 얽매인 욕망과 헛된 가치들을 포기하였을 때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었으며, 날마다 그러한 목표를 향해 묵묵히 수도의 길에 정진한 사람들이었다. 진실로 그들은 종말론적인 견지에서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토니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했고 덕의 길에 이미 들어섰으니 앞에 있는 것을 향해 곧장 나아갑시다.” 라고 자신 있게 권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과 같은 순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구원의 완성을 향한 영적 순례의 여정을 떠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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