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역사란 무엇인가?
3. 역사(歷史)와 역사(歷史)학 - 본체로서의 역사(歷史)
4. 정신사관이냐 유물사관이냐?
5. 역사는 문화의 누적과정
6. 창조론과 진화론
7.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서의 인간
8. 준 폴리티콘 (인간은 정치적 동물)
9. 인간은 종교적 동물
10. 역사를 위한 역사쓰기
11.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12.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동양사상과 역사학>
13.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기독교와 역사>
14.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민족주의와 역사학>
15.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일제식민사학과 한국 민족사학>
16.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한국의 민족사학과 그 문제점>
17.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공산주의와 역사학>
18. 역사쓰기의 독립선언 <실증주의적 역사주의>
2. 역사란 무엇인가?
3. 역사(歷史)와 역사(歷史)학 - 본체로서의 역사(歷史)
4. 정신사관이냐 유물사관이냐?
5. 역사는 문화의 누적과정
6. 창조론과 진화론
7.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서의 인간
8. 준 폴리티콘 (인간은 정치적 동물)
9. 인간은 종교적 동물
10. 역사를 위한 역사쓰기
11.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12.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동양사상과 역사학>
13.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기독교와 역사>
14.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민족주의와 역사학>
15.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일제식민사학과 한국 민족사학>
16.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한국의 민족사학과 그 문제점>
17.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공산주의와 역사학>
18. 역사쓰기의 독립선언 <실증주의적 역사주의>
본문내용
(歷史)를 연구하고 서술하였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역사(歷史)학에는 많은 문제가 따른다. 대표적인 민족사학자로 신채호와 박은식을 들 수 있는데,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한민족의 상무적 투쟁정신을 고양시키고자 하였고,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통해 일제의 야수성을 폭로하고 항일 독립정신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역사(歷史)학은 나름대로 실용적 역할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역사(歷史)학이 역사(歷史)학이냐 정치학이냐 하는 문제이었다. 역사(歷史)학은 순수과학으로써 역사(歷史)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민족주의적 역사(歷史)학은 국가의 통일과 발전이라는 목적을 지닌 일종의 정치운동이기 때문에 그 본 의미와 거리가 멀다. 둘째는 민족주의 자체의 문제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시대를 위해 만들어진 역사(歷史)이고 그 시대가 지나가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셋째는 실용성 자체의 문제인데, 민족주의 역사(歷史)학이 과연 원인인가 결과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민족주의 역사(歷史)학이 결과라면 그 실용성의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교훈을 주는 하나의 교재를 제공했다는 역할 이상은 될 수 없을 것 이었다. 넷째는 그 민족사학을 누가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이었다. 민족사관이라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누가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험성이 대두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민족주의 역사(歷史)학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일제시대 때 우리의 민족들은 이 역사(歷史)관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으며 또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생겨났다고 생각해야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족주의 역사(歷史)관에 대해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17.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공산주의와 역사학>
우리는 앞에서 역사(歷史)를 실용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살펴보았는데, 이들 못지않게 역사(歷史)를 잘 이용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토대를 닦기 위해 헤겔의 정신변증법을 학습하고, B. 바우어에게서 정치혁명가로서의 예수와 구약의 이사야서를 연구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의 피해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위하여 영국의 리카도의 효용가치설을 노동가치설로 전환시키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하여 규정되었다는 명제를 수립시켰으며 플레비안스를 위한 예수를 본받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산주의를 만들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내용에 따르면 역사(歷史)는 계급투쟁, 즉 압박자(지배층)와 피압박자(피지배층)간의 투쟁의 역사(歷史)라 할 수 있었다. 선사시대는 원시 공산사회였으나 역사(歷史)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은 생겨나게 되고 이들의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게 된 것 이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노예경제체제가 되어 귀족에 대한 농민 노예의 투쟁이 전개되었고 중세에는 농노경제시대가 되어 봉건 영주에 대한 농노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근대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격돌의 전야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의 역사(歷史)의 과제는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는 것 이었다. 이러한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는 이상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는 인류의 이상이라고 여기며 이를 추구한 것 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여 새로운 투쟁을 해야 해야한다는 것 이었다. 계급의 투쟁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歷史)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추구했지만 공산당 당원 및 그 간부들은 새로운 성직자들로 출현했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압박했으며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혁명을 빙자하여 나치를 능가하는 전제와 독재체제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18. 역사쓰기의 독립선언 <실증주의적 역사주의>
p.105 1. 역사(歷史) 자체를 위하여 역사(歷史)를 연구해야한다 .- 역사(歷史)주의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과는 달리 실증주의적 역사(歷史)학에서는 역사(歷史)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연구하고자 하였다. 앞에서 살펴봤던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에서는 목적에 사로잡혀 진리나 진실을 외면하는가 하면 사건, 사실들을 날조하고 첨가하며 삭제하는 등 학문이나 과학을 위장한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역사(歷史)를 이용하곤 하였다. 이들에 대항하여 역사(歷史)주의자들은 역사(歷史)서술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과학적 역사(歷史)학이란 현실의 관심에서 탈피하여 참된 과학적 객관성을 갖는 것을 말하는데 학문이라 함은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불변하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해야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실증주의적 역사(歷史)학에서 ‘실증적‘이라는 말은 ’과학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실증적 역사(歷史)학이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역사(歷史)학을 의미해야한다. 대표적인 역사(歷史)가 랑케의 주장을 몇 개 살펴보면, 역사(歷史)가의 임무는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고, 인간의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개체의 인식의 길과 추상의 길이 있는데 후자는 철학의 길이고, 전자가 바로 역사(歷史)학의 길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歷史)는 합리적 법칙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직접 접함으로써 파악되어야 하며 역사(歷史)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나도 앞에서 배운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보다는 실증주의적 역사(歷史)관의 주장에 더 많은 공감이 간다. 우리는 역사(歷史)를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이 지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침이자 원동력이 되는데, 이러한 역사(歷史)가 만약에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날조되었다면 인간의 역사(歷史)적 흐름은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야한다. 따라서 역사(歷史)가의 생각이 들어가기는 하되, 그 실제 사건은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역사(歷史)로서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야한다.
17.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공산주의와 역사학>
우리는 앞에서 역사(歷史)를 실용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살펴보았는데, 이들 못지않게 역사(歷史)를 잘 이용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토대를 닦기 위해 헤겔의 정신변증법을 학습하고, B. 바우어에게서 정치혁명가로서의 예수와 구약의 이사야서를 연구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의 피해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위하여 영국의 리카도의 효용가치설을 노동가치설로 전환시키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하여 규정되었다는 명제를 수립시켰으며 플레비안스를 위한 예수를 본받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산주의를 만들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내용에 따르면 역사(歷史)는 계급투쟁, 즉 압박자(지배층)와 피압박자(피지배층)간의 투쟁의 역사(歷史)라 할 수 있었다. 선사시대는 원시 공산사회였으나 역사(歷史)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은 생겨나게 되고 이들의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게 된 것 이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노예경제체제가 되어 귀족에 대한 농민 노예의 투쟁이 전개되었고 중세에는 농노경제시대가 되어 봉건 영주에 대한 농노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근대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격돌의 전야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의 역사(歷史)의 과제는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는 것 이었다. 이러한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는 이상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는 인류의 이상이라고 여기며 이를 추구한 것 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여 새로운 투쟁을 해야 해야한다는 것 이었다. 계급의 투쟁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歷史)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추구했지만 공산당 당원 및 그 간부들은 새로운 성직자들로 출현했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압박했으며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혁명을 빙자하여 나치를 능가하는 전제와 독재체제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18. 역사쓰기의 독립선언 <실증주의적 역사주의>
p.105 1. 역사(歷史) 자체를 위하여 역사(歷史)를 연구해야한다 .- 역사(歷史)주의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과는 달리 실증주의적 역사(歷史)학에서는 역사(歷史)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연구하고자 하였다. 앞에서 살펴봤던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에서는 목적에 사로잡혀 진리나 진실을 외면하는가 하면 사건, 사실들을 날조하고 첨가하며 삭제하는 등 학문이나 과학을 위장한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역사(歷史)를 이용하곤 하였다. 이들에 대항하여 역사(歷史)주의자들은 역사(歷史)서술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과학적 역사(歷史)학이란 현실의 관심에서 탈피하여 참된 과학적 객관성을 갖는 것을 말하는데 학문이라 함은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불변하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해야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실증주의적 역사(歷史)학에서 ‘실증적‘이라는 말은 ’과학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실증적 역사(歷史)학이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역사(歷史)학을 의미해야한다. 대표적인 역사(歷史)가 랑케의 주장을 몇 개 살펴보면, 역사(歷史)가의 임무는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고, 인간의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개체의 인식의 길과 추상의 길이 있는데 후자는 철학의 길이고, 전자가 바로 역사(歷史)학의 길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歷史)는 합리적 법칙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직접 접함으로써 파악되어야 하며 역사(歷史)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나도 앞에서 배운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관보다는 실증주의적 역사(歷史)관의 주장에 더 많은 공감이 간다. 우리는 역사(歷史)를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이 지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침이자 원동력이 되는데, 이러한 역사(歷史)가 만약에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날조되었다면 인간의 역사(歷史)적 흐름은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야한다. 따라서 역사(歷史)가의 생각이 들어가기는 하되, 그 실제 사건은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역사(歷史)로서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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