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본 론
3. 결 론
2. 본 론
3. 결 론
본문내용
두 주인공은 메리가 보내온 녹음테이프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꽁꽁 언 빙판 위에서 좌충우돌하던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3. 결 론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대부분에는 강박관념과 순수, 그리고 진동하는 영혼이 가득 담겨있다. 이런 요소들이 전체 구조로 부드럽게 펼쳐지고 여기에 갑작스런 단절(거짓 일치)이 개입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같이 분명한 내러티브적 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의 현실에서의 갈등과 꿈과 환상의 장면들이 중첩되면서 이 두 영화는 형식상 초현실주의의 영화의 그것과 같게 된다. <세브린느>는 영화 전체적으로 현실과 환상이 오고가고, 그 환상은 영화 속 여주인공인 세브린느의 초현실주의적 은유인 방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기승전결을 갖춘 고전적 이야기 구조이지만 중간 중간에는 극적 개연성과는 무관한 환상 장면들이 등장하고 여기서 제일 주목해야 할 점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의 결말의 모호함이다. 결국에는 처음과 끝이 현실이 아닌 환상의 장면들로 끝나면서 영화의 모호함마저 대변하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감독인 공드리는 뉴욕의 실제 장소를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자연광만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핸드 헬드와 롱 테이크를 통해 반쯤은 다큐멘터리처럼 기억이 말소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 했다. 거기에 엘렌 쿠라스는 최소한의 조명으로, 두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며 장소와 감정의 세심함을 살려냈다. 동시에 후반 디지털 공정을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형적 이미지까지 손봄으로써 ‘날것과 조형이 혼재한 카오스적 세계’라는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 영화 양식들이 어떤 특정한 장치들을 각별하게 취급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은‘사유의 종잡을 수 없는 유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인간의 희노애락이 논리와 비논리로 나눠질 수 없듯이 영화는 이야기를 논리와 비논리로 뒤섞으면서도 매커니즘적인 효과에 세심히 신경을 썼다.
제목이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듯이 엔딩에서 카메라는 호된 성찰 과정을 겪고서 하얀 눈밭을 뛰어가는 이 연인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들의 호된 경험의 기억은 관객인 우리가 가지고 있지 사실 그들은 영화 속 니체의 잠언처럼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영원성과 그 성취를 위한 인간의 끝없는 딜레마를 시적으로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두 영화에서 느껴지는 진행상의 모호함. 그냥 생각의 형상에 이끌려 표현되는 듯 싶다가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결말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특징까지 더해 이 두 영화에서는 초현실주의의 기법적 양식들이 그 영화의 주제를 표현해내는 데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고, 분명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는 그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생각 없는 감독’이라는 악평을 들었지만 지금 시대에서 그는 초현실주의를 다룬 자신만의 영화영역을 구축한 훌륭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 론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대부분에는 강박관념과 순수, 그리고 진동하는 영혼이 가득 담겨있다. 이런 요소들이 전체 구조로 부드럽게 펼쳐지고 여기에 갑작스런 단절(거짓 일치)이 개입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같이 분명한 내러티브적 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의 현실에서의 갈등과 꿈과 환상의 장면들이 중첩되면서 이 두 영화는 형식상 초현실주의의 영화의 그것과 같게 된다. <세브린느>는 영화 전체적으로 현실과 환상이 오고가고, 그 환상은 영화 속 여주인공인 세브린느의 초현실주의적 은유인 방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기승전결을 갖춘 고전적 이야기 구조이지만 중간 중간에는 극적 개연성과는 무관한 환상 장면들이 등장하고 여기서 제일 주목해야 할 점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의 결말의 모호함이다. 결국에는 처음과 끝이 현실이 아닌 환상의 장면들로 끝나면서 영화의 모호함마저 대변하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감독인 공드리는 뉴욕의 실제 장소를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자연광만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핸드 헬드와 롱 테이크를 통해 반쯤은 다큐멘터리처럼 기억이 말소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 했다. 거기에 엘렌 쿠라스는 최소한의 조명으로, 두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며 장소와 감정의 세심함을 살려냈다. 동시에 후반 디지털 공정을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형적 이미지까지 손봄으로써 ‘날것과 조형이 혼재한 카오스적 세계’라는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 영화 양식들이 어떤 특정한 장치들을 각별하게 취급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은‘사유의 종잡을 수 없는 유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인간의 희노애락이 논리와 비논리로 나눠질 수 없듯이 영화는 이야기를 논리와 비논리로 뒤섞으면서도 매커니즘적인 효과에 세심히 신경을 썼다.
제목이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듯이 엔딩에서 카메라는 호된 성찰 과정을 겪고서 하얀 눈밭을 뛰어가는 이 연인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들의 호된 경험의 기억은 관객인 우리가 가지고 있지 사실 그들은 영화 속 니체의 잠언처럼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영원성과 그 성취를 위한 인간의 끝없는 딜레마를 시적으로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두 영화에서 느껴지는 진행상의 모호함. 그냥 생각의 형상에 이끌려 표현되는 듯 싶다가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결말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특징까지 더해 이 두 영화에서는 초현실주의의 기법적 양식들이 그 영화의 주제를 표현해내는 데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고, 분명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는 그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생각 없는 감독’이라는 악평을 들었지만 지금 시대에서 그는 초현실주의를 다룬 자신만의 영화영역을 구축한 훌륭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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