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고려사』 「악지」란
3. 『고려사』 「악지」의 전체적인 구성
4. 속악조
5. 결론
2. 『고려사』 「악지」란
3. 『고려사』 「악지」의 전체적인 구성
4. 속악조
5. 결론
본문내용
강호에서의 유유자적한 삶
자하동(紫霞洞)
지은이 채홍철은 일찍이 자기 집 북쪽에 전단원을 지어 선승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라 칭하였는데, 그 모습을 노래하고 강호자연에서의 유유자적한 정취를 드러낸 작품이다.
한송정(寒松亭)
<한송정>은 강릉대도호부 동쪽 15리에 있는 정자를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는 이 노래는 슬(瑟) 밑바닥에 씌어져 강남(江南)에까지 흘러갔으나 강남 사람들은 그 가사의 뜻을 풀지 못했다. 광종조(光宗朝)에 국인(國人) 장진공(張晉公)이 사명을 받들고 강남에 갔는데 강남 사람들이 그에게 가사의 뜻을 물었다. 진공은 시를 지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달빛 밝은 한송(寒松)의 밤, 물결 가라앉은 경포(鏡浦)의 가을
슬프게 울며 왔다가는 또 가버리는, 소식 지닌 한 마리의 갈매기
총석정(叢石亭)
총석정은 기철(奇轍)이 지은 것으로, 강원도 북동부에 있는 수십 개의 돌기둥과 정자를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철은 원나라 순제(順帝) 중궁(中宮)의 동생이다. 평장(平章)벼슬을 하다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동쪽 고려로 돌아왔는데 강릉에 이르러 이 정(亭)에 올라가 사선(四仙)의 유적을 구경하고 큰 바다를 가까이 내다보면서 이 노래를 지었다.
⑥ 유배지에서 지은 노래
정과정(鄭瓜亭)
정과정은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가 지은 것이다. 서는 과정(瓜亭)이라 자호(子號)했고, 외척(外戚)과 혼인을 맺어 인종(仁宗)의 총애를 받았다.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그의 고향인 동래(東萊)로 돌려보내면서 이르기를, 오늘 가게 된 것은 조정(朝廷)의 의논에 몰려서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 서는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명령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극히 처비(悽悲)하다. 이제현이 시를 지어 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임금을 생각하여 어느날 치고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으니, 봄철 산의 뻐꾹새와도 같다.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이여 묻지 마라. 넘어가는 달과 새벽별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동백목(冬栢木)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채홍철(蔡洪哲)이 죄로 먼 섬에 유배되어 갔는데, 덕릉(德陵)을 사모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날로 소환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부터 이 노래가 있었는데, 홍철이 그 노래, 즉 가사를 고치어 자기의 뜻을 붙였다고도 한다.
⑦ 남녀간의 사랑과 기다림
양주(楊州)
양주는 곧 고려의 한양부(漢陽府)로, 북으로는 화산에 기대어 있고, 남으로는 한강에 임해있으며, 토지가 평탄하고, 생산이 풍부하고, 시가(市街)가 번화한 것이 다른 고을에 댈 것이 아니다. 양주 고을의 남녀들이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절을 즐기면서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려한 유희요(遊戱謠)로 창작전승된 노래로 보인다.
원흥(元興)
원흥진(元興鎭)은 동북 방면에 있는 화녕부(和寧府)의 속읍(屬邑)으로, 큰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읍인이 배로 장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그 아내들은 기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거사련(居士戀)
객지에 나간 사람의 아내가 이 노래를 지어 까치와 갈거미에 부쳐서 그가 돌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이 시를 지어 이 노래를 풀이하였다.
⑧ 왕을 송축하는 노래
서경(西京)
서경의 유래는 이러하다. 고조선(古朝鮮)은 즉 기자(箕子)를 봉했던 땅으로, 그곳의 백성들은 예양(禮讓)을 배워 임금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받드는 의리를 알아 이 노래를 지었다. 그 뜻은, 군장(君長)의 가득찬 인애(仁愛)와 은혜는 초목에까지 미치어 꺾인 버들까지도 살아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동강(大同江)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는데 기자는 팔조(條)의 가르침을 베풀어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을 일으키니 조야(朝野)에 일이 없었다. 백성들은 기뻐하여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영명령(永明領)을 숭산(嵩山)에 각각 비유해서 그들의 임금을 송축했다. 이 노래는 고려로 들어온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장단(長湍)
태조는 민간의 풍속을 순찰하고 부족한 것을 보급하여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했다. 백성들은 그 덕을 사모하고 오래되어도 잊지 않았으니 후대(後代)의 왕이 장단에 갔을 때 악공이 태조의 덕을 노래하고 그 후대의 왕을 송축하며 또 그를 경계한 것이다.
풍입송(風入松)
왕덕(王德)을 송축한 것으로, 한국 시가와는 거리가 먼 중국계에 속하는 악장이다. <야심사(夜深詞)>와 함께 궁정연회가 끝날 무렵 부른 노래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작품 외에도 <동동>, <무애>, <처용>, <송산>, <야심사>, <한림별곡>, <삼장>, <사룡> 등의 작품의 설명이 있다.
6. 결론
『고려사』「악지」는 고려의 아악, 당악, 속악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했는데, 이보다 더 포괄적이고 자세하게 다룬 문헌은 찾기가 어렵다. 또한 고려시대의 우리식 노래의 가사와 음악, 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삼국의 가악에 대해서도 그 자료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하고 고려와 삼국시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학, 음악, 무용을 연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헌이 『고려사』「악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적 자료에 관한 것 이외에도 사문학(詞文學) 및 시가문학 연구에 좋은 문헌자료의 역할을 하여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예술적 발전양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인들의 음악에 대한 가치관과 미적 감각을 현대의 것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
참고문헌
차주환 『고려사악지』 을유문화사, 1975
김선기, 「『高麗史』「樂志」의 俗樂歌詞에 관한 종합적 고찰, 『한국시가연구』제8집, 한국시가학회, 2000
여운필, 「『고려사』「악지」에 대하여」, 신라대학교 논문집 제59집, 신라대학교, 2009
황병익, 「고려사 악지 속악의 연행현장 탐색」, 문창어문논집 제 37집, 문창어문학회, 2000
김미영, 「당악정재의 규칙성과 사상성 연구」,성균관대학교, 2009
자하동(紫霞洞)
지은이 채홍철은 일찍이 자기 집 북쪽에 전단원을 지어 선승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라 칭하였는데, 그 모습을 노래하고 강호자연에서의 유유자적한 정취를 드러낸 작품이다.
한송정(寒松亭)
<한송정>은 강릉대도호부 동쪽 15리에 있는 정자를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는 이 노래는 슬(瑟) 밑바닥에 씌어져 강남(江南)에까지 흘러갔으나 강남 사람들은 그 가사의 뜻을 풀지 못했다. 광종조(光宗朝)에 국인(國人) 장진공(張晉公)이 사명을 받들고 강남에 갔는데 강남 사람들이 그에게 가사의 뜻을 물었다. 진공은 시를 지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달빛 밝은 한송(寒松)의 밤, 물결 가라앉은 경포(鏡浦)의 가을
슬프게 울며 왔다가는 또 가버리는, 소식 지닌 한 마리의 갈매기
총석정(叢石亭)
총석정은 기철(奇轍)이 지은 것으로, 강원도 북동부에 있는 수십 개의 돌기둥과 정자를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철은 원나라 순제(順帝) 중궁(中宮)의 동생이다. 평장(平章)벼슬을 하다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동쪽 고려로 돌아왔는데 강릉에 이르러 이 정(亭)에 올라가 사선(四仙)의 유적을 구경하고 큰 바다를 가까이 내다보면서 이 노래를 지었다.
⑥ 유배지에서 지은 노래
정과정(鄭瓜亭)
정과정은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가 지은 것이다. 서는 과정(瓜亭)이라 자호(子號)했고, 외척(外戚)과 혼인을 맺어 인종(仁宗)의 총애를 받았다.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그의 고향인 동래(東萊)로 돌려보내면서 이르기를, 오늘 가게 된 것은 조정(朝廷)의 의논에 몰려서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 서는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명령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극히 처비(悽悲)하다. 이제현이 시를 지어 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임금을 생각하여 어느날 치고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으니, 봄철 산의 뻐꾹새와도 같다.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이여 묻지 마라. 넘어가는 달과 새벽별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동백목(冬栢木)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채홍철(蔡洪哲)이 죄로 먼 섬에 유배되어 갔는데, 덕릉(德陵)을 사모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날로 소환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부터 이 노래가 있었는데, 홍철이 그 노래, 즉 가사를 고치어 자기의 뜻을 붙였다고도 한다.
⑦ 남녀간의 사랑과 기다림
양주(楊州)
양주는 곧 고려의 한양부(漢陽府)로, 북으로는 화산에 기대어 있고, 남으로는 한강에 임해있으며, 토지가 평탄하고, 생산이 풍부하고, 시가(市街)가 번화한 것이 다른 고을에 댈 것이 아니다. 양주 고을의 남녀들이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절을 즐기면서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려한 유희요(遊戱謠)로 창작전승된 노래로 보인다.
원흥(元興)
원흥진(元興鎭)은 동북 방면에 있는 화녕부(和寧府)의 속읍(屬邑)으로, 큰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읍인이 배로 장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그 아내들은 기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거사련(居士戀)
객지에 나간 사람의 아내가 이 노래를 지어 까치와 갈거미에 부쳐서 그가 돌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이 시를 지어 이 노래를 풀이하였다.
⑧ 왕을 송축하는 노래
서경(西京)
서경의 유래는 이러하다. 고조선(古朝鮮)은 즉 기자(箕子)를 봉했던 땅으로, 그곳의 백성들은 예양(禮讓)을 배워 임금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받드는 의리를 알아 이 노래를 지었다. 그 뜻은, 군장(君長)의 가득찬 인애(仁愛)와 은혜는 초목에까지 미치어 꺾인 버들까지도 살아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동강(大同江)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는데 기자는 팔조(條)의 가르침을 베풀어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을 일으키니 조야(朝野)에 일이 없었다. 백성들은 기뻐하여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영명령(永明領)을 숭산(嵩山)에 각각 비유해서 그들의 임금을 송축했다. 이 노래는 고려로 들어온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장단(長湍)
태조는 민간의 풍속을 순찰하고 부족한 것을 보급하여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했다. 백성들은 그 덕을 사모하고 오래되어도 잊지 않았으니 후대(後代)의 왕이 장단에 갔을 때 악공이 태조의 덕을 노래하고 그 후대의 왕을 송축하며 또 그를 경계한 것이다.
풍입송(風入松)
왕덕(王德)을 송축한 것으로, 한국 시가와는 거리가 먼 중국계에 속하는 악장이다. <야심사(夜深詞)>와 함께 궁정연회가 끝날 무렵 부른 노래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작품 외에도 <동동>, <무애>, <처용>, <송산>, <야심사>, <한림별곡>, <삼장>, <사룡> 등의 작품의 설명이 있다.
6. 결론
『고려사』「악지」는 고려의 아악, 당악, 속악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했는데, 이보다 더 포괄적이고 자세하게 다룬 문헌은 찾기가 어렵다. 또한 고려시대의 우리식 노래의 가사와 음악, 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삼국의 가악에 대해서도 그 자료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하고 고려와 삼국시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학, 음악, 무용을 연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헌이 『고려사』「악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적 자료에 관한 것 이외에도 사문학(詞文學) 및 시가문학 연구에 좋은 문헌자료의 역할을 하여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예술적 발전양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인들의 음악에 대한 가치관과 미적 감각을 현대의 것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
참고문헌
차주환 『고려사악지』 을유문화사, 1975
김선기, 「『高麗史』「樂志」의 俗樂歌詞에 관한 종합적 고찰, 『한국시가연구』제8집, 한국시가학회, 2000
여운필, 「『고려사』「악지」에 대하여」, 신라대학교 논문집 제59집, 신라대학교, 2009
황병익, 「고려사 악지 속악의 연행현장 탐색」, 문창어문논집 제 37집, 문창어문학회, 2000
김미영, 「당악정재의 규칙성과 사상성 연구」,성균관대학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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