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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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회와 국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 제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 때문이다. 윌리스턴 워커,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上』, 66-67.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변증가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2세기에서 3세기 중엽까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주목해 볼 수 있는 부분은 갈등 양상이 공식화 되고, 이전에 비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갈등은 전면적 대결 구도는 아니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아직 로마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전국적으로 처리할 만금의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다. 대신 각 지역적 문제로 등장하면서, 지역 총독들과 갈등 양상을 보였다.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는 일반 대중들의 불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도 여전히 안고 있었다.
4.3. 3세기 중엽 이 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직접 처리해야 할 문제로 떠올랐다. 데키우스의 박해가 비록 짧은 시기에 걸쳐 일어났고, 다시 대대적인 박해가 진행될 때까지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평화가 있었지만,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행해진 데키우스의 박해는 분명 이전과 구분되는 전환점을 보여준다.
3세기 들어 로마는 외부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게 된다. 커져가는 위기와 불안정한 상황(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유례없는 군사적 행사를 통하여 그리고 재건을 통하여 결국 이 상황에서 살아남았다)은 종교적인 차원 또한 가지고 있었다. 윌리스턴 워커,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上』, 111.
이러한 위기가 전통 신들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국의 위기에서 황제가 추구했던 것은 로마 전통의 회복이었다. 로마 전통적 제신 숭배를 통해 제국의 종교적 기초를 다지며 통합을 추구하고 동시에 황제의 통치권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황제의 의도에 부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무시하기에는 기독교 공동체는 더 이상 지역적이고 산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워커는 3세기 후반에는 시작에 불과하지만 지역 교회 수준에서 조직의 시작을 본다고 말한다. 윌리스턴 워커,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上』, 117-118.
지역에서 특별한 지위와 권위를 가진 자로서의 감독이 생겨났고, 공의회 제도의 발달과 아울러 체계가 나타났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라는 사실은 기독교 공동체의 가시적 존재를 짐작케 해 준다. 칼 호이시는 교회가 점차 국가 내의 국가로 발전해 갔다라고도 말했다. 칼 호이시, 손규태 옮김, 『칼 호이시의 세계 교회사』, 91.
자연히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 황제와의 전면적인 대결 구도가 드러났다.
이 대결 구도는 앞서 이미 밝혔듯이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제국은 일종의 국가종교적 형태를 띄고 있었다. 정치 공동체가 우위에 있으면서 종교를 인정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패턴이다. 김흥수, “교회와 국가 관계의 역사적 유형”, 『신학사상』, 제59집(1987. 12), 824.
따라서 로마제국이 펴나간 종교 정책을 일탈하고, 더 이상의 포섭이 가능하지 않았던 기독교 공동체는 종교적 정책을 흔드는 존재를 넘어서 제국의 통치 근간을 어지럽히는 정치적 위협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초기의 잠재적 위협이 가시적 실체로 등장한 것이다.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하기 전까지의 상황은 정치적 혼란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극복하고 다시 제국을 평정한 콘스탄틴 황제 시대는 기독교가 중심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로마제국이 처음부터 추구해왔던 국가종교적 형태를 유지하면서 종교를 로마의 전통적 종교에서 기독교로 바꾼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른스트 다스만도 사실상 종교에 뿌리를 내린 제국이며, 끊임없이 선전되고 실시된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포기하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정 종교를 믿도록 강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다스만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기독교 공동체가 이기거나 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에른스트 다스만, 하성수 옮김, 『교회사 I』, 173.
롤란드 베인튼도 로마제국이 종교적 제국임을 말했다. 베인튼은 3세기가 저물면서 종교적 쟁점이 갈수록 제국의 중대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보편 종교가 필수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기독교인들의 존재로 인해 뭔가 다른 대안을 필요로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의 세속화나 기독교의 근절은 각각 생각할 수도 없고, 성공하지도 못한 방법이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기독교가 인구 대다수를 포괄하는 종교가 되는 것이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롤란드 베인튼, 이길상 옮김, 『기독교의 역사』, 96.
4. 나가는 글
이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겪었던 박해의 상황을 몇몇의 역사적 사건들과 초대 교부들의 교회와 국가 인식을 살펴보고, 시대와 사건에 따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았다.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토대로 초대 박해기의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호하는 선에서 로마제국의 정책과 권위에 철저히 순응하며 협조하는 관계를 모색했다. 그러나 이러한 순응과 타협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국가종교 시스템은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좌시할 수 없었다. 순응과 타협에도 불구하고 박해와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초대교회는 결국 국가권력에 굴복한 이들과 대결한 이들의 갈등과 분열을 낳았다.
헨리 채드윅은 “교회의 역설은 그것이 종교적으로 혁명적인 운동이면서도, 의식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교회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사로잡고자 의도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권력 획득에 무관심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헨리 채드윅, 박종숙 옮김, 『초대교회사』, 79.
라고 말했다. 이러한 역설이 로마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역동성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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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4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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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8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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