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해 마련된 혁명 원칙과 사상이론적 자원을 재료로 하여 김정일이 구체적으로 북한 사회에 적용하고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김정일에 의해 비로소 북한의 수령제 사회주의가 내용적으로 구체화 체계화 제도화 되었으며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을 절대화 신격화 하였고, 이론화 체계화 하였으며 온 사회를 의식화 조직화 하였고 당규율의 철저한 확립을 통해 관료 조직체계로 수령제 관료체계로 구축하였다. 1986년에는 북한 사회의 집단주의적 성격을 밝히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내놓는다. 이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당과 대중의 일심단결의 사회를 정당화한 주체사사상의 또하나의 구성부분이 되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등장은 혁명적 수령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김정일 체제의 강점과 그 한계
김정일 유일지도체제의 강점은 공식적인 권력의 승계와는 달리 김정일의 유일 지도가 오랫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기에 단계적 과정을 밟으면서 형성되어 와서 그의 통제력과 당, 정, 군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령체계는 1990년대 위기를 버티게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최대의 약점은 집단적 동원과 군중운동에는 유리하지만 개인의 개성과 창발성에 기초한 생산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는 취약점을 보이게 된다. 수령체계가 요구하는 유일성은 경제건설 등의 분야에서 비효율성을 낳을 수가 있다. 정치적 정당성을 통해 체제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있으나 경제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제7장 결론: 수령제 사회주의의 미래
앞에 장 요약
Ⅱ.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및 그 이유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으며 그 스스로의 능력 검증을 통해 후계자 지위를 단계적이며 체계적으로 공고히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은 최초 정치 입문을 당내 조직지도부에서 시작하였다. 특히 문학예술분야에 대한 지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김일성의 유일사상에 대한 선전을 통해 항일원로와 김일성으로부터 능력을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당규율 강화 및 온 사회의 김일성화 등을 이유로 당의 지도를 강화하면서 점차 자신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정부기관과 군에 대한 지도로 확대시켜 나갔다는 점, 경제적 측면에서도 70일전투, 홍-전을 모두 갖춘 인재 등용 등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3대 혁명소조운동 등 대중운동을 통해 지도자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갔다는 점 등으로 보아 김일성 못지않게 타고난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김일성이 인격적 리더십에 기초하여 제도적 리더십을 만든 인물이라면 김정일은 제도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인격적 리더십을 창조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Ⅲ. 새롭게 알게 된 사실
1. 김정일 후계자 추대에 대해 김일성이 주저하였고 몇 번 보류하였다는 점
1971년 5월 김영주가 직접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정일을 조직 사상 비서에 앉히자고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이 보류하였으며 1972년 최용건, 김영주, 김일 등이 김정일에게 당의 전권을 부여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다시 김일성이 김정일의 젊은 나이를 들어 더 넓은 범주에서 후계자를 찾아보자고 제안하였으며 같은해 12월 상무회의에서 재차 밀어붙였으나 역시 결정이 연기되었다. 1973년에 이르러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장 겸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겸 선전비서의 자리에 올라 당위대권을 맡게 되었으며 공식추대 이전에 이미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한 항일 원로들의 노력은 김일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1973년 9월 원로1세대들은 김정일의 임명사실을 하급단체와 당원에게 하달했고 김정일을 유일한 후계자로 받들고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맹세서를 제출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원로 1세대들의 의도는 김정일이 후계자임을 못박이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김정일의 후계자 추대는 항일 원로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성사되었고 결국 김정일은 1974년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며 문서로 공식화 된 것은 75년 2월 제5기 9차 전원회의 였다고 한다. 정작 김일성은 항일원로들의 추천에 주저했으며 주저하는 김일성을 설득한 것은 김일, 임춘추 등의 항일 원로들이었다고 한다.
2. 김정일이 김일성의 신격화를 주도하였다는 점
김일성의 수령제를 이론적으로 제도적으로 강화한 것이 김일성 본인이 아니라 김정일이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1970년대 북한의 업적을 김정일이 주도하였다고 하는 인정하는 점에서 보아 1970년대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항일원로 및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선정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도전과 당내 서열 3인자인 김동규의 비판 등도 이겨내고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에게도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과 인격적 리더십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다.
Ⅳ. 궁금한 점
판문점 사태를 김정일이 지시하였다는 점으로보아 당시 후계자 지위에 있던 김정일이 직접 그와 같은 지시를 한 점은 수령인 김일성은 상징적인 존재였고 김정일이 실질적인 권력자의 위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는 영도, 김정일은 지도라고 지칭하는데 사실상 실질적인 권력은 어느 쪽에 있었는지 혹은 언제부터 김정일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Ⅲ. 평가
이 책도 앞의 이테섭 교수책과 같이 북한의 경제위기와 국제적 위기속에서 수령제와 후계자론은 북한 최고지도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고 그들의 집단적인 의지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김일성의 계속된 숙청 끝에 남게된 최고지도부가 김일성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가 있는 사실상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는지가 의심스럽다. 3인자인 김동규는 김정일에 대한 한 번의 비판으로 숙청되었는데 항일원로들이 김일성이 실제로 반대하거나 여러 번 보류한 후계자 내정을 김일성의 허락이 추진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김일성이 혈연관계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대해 대외적인 명분을 실어주기 위해 항일원로와 함께 짠 각본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납득이 갈 것 같다.
2. 김정일 체제의 강점과 그 한계
김정일 유일지도체제의 강점은 공식적인 권력의 승계와는 달리 김정일의 유일 지도가 오랫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기에 단계적 과정을 밟으면서 형성되어 와서 그의 통제력과 당, 정, 군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령체계는 1990년대 위기를 버티게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최대의 약점은 집단적 동원과 군중운동에는 유리하지만 개인의 개성과 창발성에 기초한 생산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는 취약점을 보이게 된다. 수령체계가 요구하는 유일성은 경제건설 등의 분야에서 비효율성을 낳을 수가 있다. 정치적 정당성을 통해 체제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있으나 경제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제7장 결론: 수령제 사회주의의 미래
앞에 장 요약
Ⅱ.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및 그 이유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으며 그 스스로의 능력 검증을 통해 후계자 지위를 단계적이며 체계적으로 공고히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은 최초 정치 입문을 당내 조직지도부에서 시작하였다. 특히 문학예술분야에 대한 지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김일성의 유일사상에 대한 선전을 통해 항일원로와 김일성으로부터 능력을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당규율 강화 및 온 사회의 김일성화 등을 이유로 당의 지도를 강화하면서 점차 자신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정부기관과 군에 대한 지도로 확대시켜 나갔다는 점, 경제적 측면에서도 70일전투, 홍-전을 모두 갖춘 인재 등용 등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3대 혁명소조운동 등 대중운동을 통해 지도자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갔다는 점 등으로 보아 김일성 못지않게 타고난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김일성이 인격적 리더십에 기초하여 제도적 리더십을 만든 인물이라면 김정일은 제도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인격적 리더십을 창조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Ⅲ. 새롭게 알게 된 사실
1. 김정일 후계자 추대에 대해 김일성이 주저하였고 몇 번 보류하였다는 점
1971년 5월 김영주가 직접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정일을 조직 사상 비서에 앉히자고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이 보류하였으며 1972년 최용건, 김영주, 김일 등이 김정일에게 당의 전권을 부여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다시 김일성이 김정일의 젊은 나이를 들어 더 넓은 범주에서 후계자를 찾아보자고 제안하였으며 같은해 12월 상무회의에서 재차 밀어붙였으나 역시 결정이 연기되었다. 1973년에 이르러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장 겸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겸 선전비서의 자리에 올라 당위대권을 맡게 되었으며 공식추대 이전에 이미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한 항일 원로들의 노력은 김일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1973년 9월 원로1세대들은 김정일의 임명사실을 하급단체와 당원에게 하달했고 김정일을 유일한 후계자로 받들고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맹세서를 제출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원로 1세대들의 의도는 김정일이 후계자임을 못박이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김정일의 후계자 추대는 항일 원로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성사되었고 결국 김정일은 1974년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며 문서로 공식화 된 것은 75년 2월 제5기 9차 전원회의 였다고 한다. 정작 김일성은 항일원로들의 추천에 주저했으며 주저하는 김일성을 설득한 것은 김일, 임춘추 등의 항일 원로들이었다고 한다.
2. 김정일이 김일성의 신격화를 주도하였다는 점
김일성의 수령제를 이론적으로 제도적으로 강화한 것이 김일성 본인이 아니라 김정일이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1970년대 북한의 업적을 김정일이 주도하였다고 하는 인정하는 점에서 보아 1970년대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항일원로 및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선정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도전과 당내 서열 3인자인 김동규의 비판 등도 이겨내고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에게도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과 인격적 리더십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다.
Ⅳ. 궁금한 점
판문점 사태를 김정일이 지시하였다는 점으로보아 당시 후계자 지위에 있던 김정일이 직접 그와 같은 지시를 한 점은 수령인 김일성은 상징적인 존재였고 김정일이 실질적인 권력자의 위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는 영도, 김정일은 지도라고 지칭하는데 사실상 실질적인 권력은 어느 쪽에 있었는지 혹은 언제부터 김정일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Ⅲ. 평가
이 책도 앞의 이테섭 교수책과 같이 북한의 경제위기와 국제적 위기속에서 수령제와 후계자론은 북한 최고지도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고 그들의 집단적인 의지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김일성의 계속된 숙청 끝에 남게된 최고지도부가 김일성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가 있는 사실상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는지가 의심스럽다. 3인자인 김동규는 김정일에 대한 한 번의 비판으로 숙청되었는데 항일원로들이 김일성이 실제로 반대하거나 여러 번 보류한 후계자 내정을 김일성의 허락이 추진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김일성이 혈연관계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대해 대외적인 명분을 실어주기 위해 항일원로와 함께 짠 각본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납득이 갈 것 같다.
추천자료
[북한 연구] - 김정일 리더쉽 연구(정영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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