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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사회」11(1998, 11), 1515~1518; 백선기는 그가 신의주 경차러소 압송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인 만큼 속일 필요도 없고 속일수도 없는 상황의 사진이라 주장한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하여 김산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를 확신하게 되었다. 사진에서는 그의 본명을 장지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산이 중국에서 사용한 가명들을 밝혀주고 있다. 가명으로 장지락, 장북성, 장북신, 유청화, 유춘화, 한국류, 유금명, 장지학, 유명, 유금○, 유자재, 이철함, 유치화, 유한산, 유한평, 장명, 김산이며, 필명은 북성, 염광, 황야이다; 백선기, 홍정선, “한 장의 사진과 김산의 생애,” 「문학과 사회」, 1520.
사진의 아래 적혀 있는 기록이 그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틀린 날짜(영사관 인도 날짜, 1931년 2월 1일→1월 14일 이전)를 바로잡아 주었다. 백선기, 홍정선, “한 장의 사진과 김산의 생애,” 「문학과 사회」, 1519~1520.
입수한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하여 ‘김산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었고, 역사의 불확실하거나 비어 있는 부분들을 정정하고 메울 수 있게 된 것이다.
② 이한열과 6월 항쟁
이한열의 사진은 사료로써의 사진이 갖는 증언의 힘 보다는 언론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이며 보도 사진의 특성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그 한 장의 사진이 보여준 영향력을 참고하고자 한다.
2) 사진 증언의 오류
① 신궁 참배, 장소 표기의 오류
사진자료의 시각적 증명의 효과는 기록의 보조 자료로써나 사진 그 자체로도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다. 사진자료는 눈앞의 물증으로, 쉽게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높은 신뢰도와 뛰어난 증언력에도 불구하고, 오류의 문제가 있다. 이는 사진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검증(사료비평)의 부주의로 인한 오용이라 하겠다. ‘1943년 4월 3일 나라(奈良)신궁을 참배한 한국기독교대표자들’의 사진 자료로 사용되어 온 사진이 그러한 사진증언의 오류중의 하나이다. 2008년 여름 서정민 교수님과 몇몇 교회사 학우들이 함께 한 일본 답사에서 ‘1943년 4월 3일 나라신궁 참배\' 사진의 배경과 실제 나라 신궁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1943년 한국기독교지도자대표단 신궁참배 단체사진 전승의 정정,”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85(2009, 1), 21-30; 나라 신궁에 관하여 본 발제문에 이용된 자료는 홍이표 학우가 제공해 준 것이다. 2008년 여름 서정민 교수님을 동반한 몇몇 학우들의 일본 답사에서 ‘1943년 4월 3일 나라신궁 참배\' 사진의 배경과 실제 나라 신궁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본 발제문의 내용은 위 논문의 발췌요약이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잠든 이세신궁(伊勢神宮), 1920년에 완공된 동경의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일본을 세운 초대천황 신무(神武)가 봉제된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은 국가신도를 대표하는 신궁으로 가장 성스럽고 권위 있게 조성되었기에 강제적인 집단 참배가 수시로 종용된 핵심 성지였다. 이 중에서도 가시하라신궁은 일본국(日本國)을 세운 시조 인물이 모셔진 곳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국가 신도의 참배지였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22.
제일 먼저 신사참배 정책에 승복하였던 감리교의 양주삼 목사를 비롯해 이명직(성결교), 홍택기(장로교) 목사 등은 1938년 12월 12일에 조선 기독교계를 대표해 일본의 가시하라신궁, 이세신궁 등에 참배 길을 오른 바 있다. 이후 1943년에 한국 기독교 목사 대표단이 나라 신궁을 참배 길에 올랐다. 그 때 촬영한, 나라 신궁 참배 단체사진의 배경을 보면, 일본 전통의 반원형 지붕이 목사 대표단 뒤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나라 신궁에는 그 모양을 한 지붕 구조물이 없었다. 1943년 목사 대표단의 신궁 참배 사진은 나라 신궁 앞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 신궁으로부터 열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는 동대사의 대불전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의 장소가 잘못 전승된 것이다. 최근에 편찬된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화보집』에서도 그 단체 사진은 “한국기독교 대표자들이 일본 나라(奈良)신궁에서 참배(1943)”라는 문구로 소개 김중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화보집 제1권(1901-1945)』, 장신대출판부, 밀알기획, 2008, 202쪽.
되고 있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26-27.
동대사(東大寺)는 745년에 쇼무천황(聖武天皇)에 의해 나라(奈良)에 세워져 752년에 완성된 불교(화엄종) 사찰이다. 하지만 일본 황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함으로써 세워진 절이므로 그 자체로서 천황가의 위엄을 상징했으며, 황실 관련 사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1943년에 촬영된 문제의 단체사진 뒤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아치(반원형) 지붕이 보인다. 그러므로 목사 대표단의 참배 길에 오른 사진을 이용할 때에는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하고 나라 동대사를 방문한 한국 기독교 대표단(1943)”이라고 표기해야만 정확할 것이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85(2009, 1), 29-30.
② 인명 표기 오류
2008년 출판된 『대전제일교회 100년사: 1908~2008』에서 인명 표기 오류의 내용을 지적한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고 있던 샤프(R. A. Sharp) 선교사가 1904년 공주선교부의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0년 간행된 대전의『유성교회의 역사』에 샤프 선교사의 사진이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샤프 선교사로 둔갑한 주인공은 1933년부터 대전(제일)감리교회에 속했던 사우어(C. A. Sharp, 사월) 선교사이다. 이는 1949년에 발간된 <監理會報>에 게재된 “사월 선교사 재내한 관련 보도” “사월 선교사 래한,” <監理會報>, 1949년 5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하여 김산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를 확신하게 되었다. 사진에서는 그의 본명을 장지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산이 중국에서 사용한 가명들을 밝혀주고 있다. 가명으로 장지락, 장북성, 장북신, 유청화, 유춘화, 한국류, 유금명, 장지학, 유명, 유금○, 유자재, 이철함, 유치화, 유한산, 유한평, 장명, 김산이며, 필명은 북성, 염광, 황야이다; 백선기, 홍정선, “한 장의 사진과 김산의 생애,” 「문학과 사회」, 1520.
사진의 아래 적혀 있는 기록이 그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틀린 날짜(영사관 인도 날짜, 1931년 2월 1일→1월 14일 이전)를 바로잡아 주었다. 백선기, 홍정선, “한 장의 사진과 김산의 생애,” 「문학과 사회」, 1519~1520.
입수한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하여 ‘김산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었고, 역사의 불확실하거나 비어 있는 부분들을 정정하고 메울 수 있게 된 것이다.
② 이한열과 6월 항쟁
이한열의 사진은 사료로써의 사진이 갖는 증언의 힘 보다는 언론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이며 보도 사진의 특성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그 한 장의 사진이 보여준 영향력을 참고하고자 한다.
2) 사진 증언의 오류
① 신궁 참배, 장소 표기의 오류
사진자료의 시각적 증명의 효과는 기록의 보조 자료로써나 사진 그 자체로도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다. 사진자료는 눈앞의 물증으로, 쉽게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높은 신뢰도와 뛰어난 증언력에도 불구하고, 오류의 문제가 있다. 이는 사진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검증(사료비평)의 부주의로 인한 오용이라 하겠다. ‘1943년 4월 3일 나라(奈良)신궁을 참배한 한국기독교대표자들’의 사진 자료로 사용되어 온 사진이 그러한 사진증언의 오류중의 하나이다. 2008년 여름 서정민 교수님과 몇몇 교회사 학우들이 함께 한 일본 답사에서 ‘1943년 4월 3일 나라신궁 참배\' 사진의 배경과 실제 나라 신궁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1943년 한국기독교지도자대표단 신궁참배 단체사진 전승의 정정,”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85(2009, 1), 21-30; 나라 신궁에 관하여 본 발제문에 이용된 자료는 홍이표 학우가 제공해 준 것이다. 2008년 여름 서정민 교수님을 동반한 몇몇 학우들의 일본 답사에서 ‘1943년 4월 3일 나라신궁 참배\' 사진의 배경과 실제 나라 신궁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본 발제문의 내용은 위 논문의 발췌요약이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잠든 이세신궁(伊勢神宮), 1920년에 완공된 동경의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일본을 세운 초대천황 신무(神武)가 봉제된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은 국가신도를 대표하는 신궁으로 가장 성스럽고 권위 있게 조성되었기에 강제적인 집단 참배가 수시로 종용된 핵심 성지였다. 이 중에서도 가시하라신궁은 일본국(日本國)을 세운 시조 인물이 모셔진 곳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국가 신도의 참배지였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22.
제일 먼저 신사참배 정책에 승복하였던 감리교의 양주삼 목사를 비롯해 이명직(성결교), 홍택기(장로교) 목사 등은 1938년 12월 12일에 조선 기독교계를 대표해 일본의 가시하라신궁, 이세신궁 등에 참배 길을 오른 바 있다. 이후 1943년에 한국 기독교 목사 대표단이 나라 신궁을 참배 길에 올랐다. 그 때 촬영한, 나라 신궁 참배 단체사진의 배경을 보면, 일본 전통의 반원형 지붕이 목사 대표단 뒤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나라 신궁에는 그 모양을 한 지붕 구조물이 없었다. 1943년 목사 대표단의 신궁 참배 사진은 나라 신궁 앞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 신궁으로부터 열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는 동대사의 대불전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의 장소가 잘못 전승된 것이다. 최근에 편찬된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화보집』에서도 그 단체 사진은 “한국기독교 대표자들이 일본 나라(奈良)신궁에서 참배(1943)”라는 문구로 소개 김중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화보집 제1권(1901-1945)』, 장신대출판부, 밀알기획, 2008, 202쪽.
되고 있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26-27.
동대사(東大寺)는 745년에 쇼무천황(聖武天皇)에 의해 나라(奈良)에 세워져 752년에 완성된 불교(화엄종) 사찰이다. 하지만 일본 황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함으로써 세워진 절이므로 그 자체로서 천황가의 위엄을 상징했으며, 황실 관련 사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1943년에 촬영된 문제의 단체사진 뒤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아치(반원형) 지붕이 보인다. 그러므로 목사 대표단의 참배 길에 오른 사진을 이용할 때에는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하고 나라 동대사를 방문한 한국 기독교 대표단(1943)”이라고 표기해야만 정확할 것이다. 홍이표, “굴욕의 땅,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찾아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85(2009, 1), 29-30.
② 인명 표기 오류
2008년 출판된 『대전제일교회 100년사: 1908~2008』에서 인명 표기 오류의 내용을 지적한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고 있던 샤프(R. A. Sharp) 선교사가 1904년 공주선교부의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0년 간행된 대전의『유성교회의 역사』에 샤프 선교사의 사진이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샤프 선교사로 둔갑한 주인공은 1933년부터 대전(제일)감리교회에 속했던 사우어(C. A. Sharp, 사월) 선교사이다. 이는 1949년에 발간된 <監理會報>에 게재된 “사월 선교사 재내한 관련 보도” “사월 선교사 래한,” <監理會報>, 1949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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