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Ⅱ 결론
Ⅱ 본론
Ⅱ 결론
본문내용
먹고 마시는 삶,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회복시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가 약속한 하나님 나라를 온몸과 맘을 다해 받아들이고 그로서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예수는 지금 교회처럼 세상을 부정하고 저승만을 꿈꾸게 하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처럼 복음이 참된 복음으로 작용하고, 하나님 나라를 참된 기쁨과 설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예루살렘 예수만이 아닌 갈릴리 예수를 삶으로 전해야하며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나 머지않아 숨 쉬는 것조차 돈이 필요하게 될, 결국 돈 없는 이들은 살지 못할 현실에선 더더욱 갈릴리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교회에, 내세에, 교리에, 믿음에만 머물러있다. 사회의 아픔을 방관하고 외면하며 심지어 사회적 악과 모순 때문에 고통에 처한 이들을 정죄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의 말을 오인했고 왜곡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왜곡시킨 예수의 가르침, 기독교인이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회적 악에 굴복하거나 외면하도록 만들게 했던 변질된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변질된 가르침
세상은 악하다. 교회는 그런 세상의 악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악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라는 가르침보다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로써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저 ‘교회’에 머무르는 멈춰버린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은 악에 굴복하고, 그 피해자의 고통을 방관하라는 의미가 아닌 그 반대의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늘 변화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권력과 억압의 구조에 대항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는 ‘죽음’까지도 요구하고 있기에 누구나 그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위의 말씀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복음이 회피와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을 어원적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불의에 방조하고, 저항의지를 꺾은 채 거대한 사회적 악의 구조에 굴복하라는 말씀과는 전혀 반대로,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제 3의 방법으로 그 악에 맞서라는 선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가 살았던 삶이자, 억압과 소외로 고난받던 이들에게 주신 복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의 참된 의미
위의 말씀에서 ‘대적’은 그리스어 ‘안티(anti)’와 ‘히스테미(histemi)’로 이루어진 단어로, 전자는 ‘맞서서’ 후자는 ‘폭력적인 반란, 무장 봉기, 첨예한 대결’을 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안티스테나이(antistenai)’가 군사적 충돌의 의미로 사용되었고(71회 중 44회),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인(막 15:7, 눅 23:19, 25)” 장면에서 언급된다.
이처럼 이 단어는 인명살상의 가능성이 있는 무장혁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치지 말라,”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진 예수의 비폭력 선언인 것이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28-29.
위의 선언은 거대한 악의 권력 앞에 두려움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도, 거대한 권력과 억압체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거슬리는 말씀일 것이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더더욱 막아내야 하는 말씀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왜 제임스 왕(최초로 영어번역 성경 흠정역을 만든 영국의 왕)의 충실한 학자들이 ‘안티스테나이’를 ‘resist not’ 즉, ‘저항하지 말라’라고 번역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임스 왕은 분명 군주들의 부당한 정책에 맞설 수 있는, ‘굴복’과 ‘싸움’이 아닌 전혀 새로운 ‘예수의 방법’이 있음을 억압되고 소외된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폭력적 억압으로 유지시키는 구조적 악을 뒤엎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효과적이며 새로운 저항’을 마치 악에게 ‘굴복’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에 반하는 이들의 저항정신을 예방하였던 것이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12-14.
그리고 이러한 ‘굴복’은 21세기인 지금도 흔히 보여 지는 기독교인의 비겁한 양태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악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악에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뒤에 나오는 세 가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2) 비폭력 저항의 세 가지 사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원수가 억압하는 만큼 두 배로 사랑해주라는, 실천하기 힘든 말씀으로 이해되며 교회에서도 이 말씀을 가지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공허한 설교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그런 설교를 들은 청중은 사회적 악과 무조건적 사랑 간의 모순에 고민하고, 오히려 악을 외면해버리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에 있어서, 특히 그 당시 억압 받는, 소외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창조적이며 효과적인 저항을 가능케 하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왼손은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고 따라서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선 오른손 손등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사회에서 그 의도는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닌 치욕을 주기 위함으로서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 방법이었는데 즉,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32. 쿰란공동체 에서는 왼손을 사용해 제스처를 했을 경우 공동체에서
이처럼 복음이 참된 복음으로 작용하고, 하나님 나라를 참된 기쁨과 설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예루살렘 예수만이 아닌 갈릴리 예수를 삶으로 전해야하며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나 머지않아 숨 쉬는 것조차 돈이 필요하게 될, 결국 돈 없는 이들은 살지 못할 현실에선 더더욱 갈릴리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교회에, 내세에, 교리에, 믿음에만 머물러있다. 사회의 아픔을 방관하고 외면하며 심지어 사회적 악과 모순 때문에 고통에 처한 이들을 정죄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의 말을 오인했고 왜곡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왜곡시킨 예수의 가르침, 기독교인이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회적 악에 굴복하거나 외면하도록 만들게 했던 변질된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변질된 가르침
세상은 악하다. 교회는 그런 세상의 악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악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라는 가르침보다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로써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저 ‘교회’에 머무르는 멈춰버린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은 악에 굴복하고, 그 피해자의 고통을 방관하라는 의미가 아닌 그 반대의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늘 변화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권력과 억압의 구조에 대항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는 ‘죽음’까지도 요구하고 있기에 누구나 그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위의 말씀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복음이 회피와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을 어원적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불의에 방조하고, 저항의지를 꺾은 채 거대한 사회적 악의 구조에 굴복하라는 말씀과는 전혀 반대로,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제 3의 방법으로 그 악에 맞서라는 선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가 살았던 삶이자, 억압과 소외로 고난받던 이들에게 주신 복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의 참된 의미
위의 말씀에서 ‘대적’은 그리스어 ‘안티(anti)’와 ‘히스테미(histemi)’로 이루어진 단어로, 전자는 ‘맞서서’ 후자는 ‘폭력적인 반란, 무장 봉기, 첨예한 대결’을 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안티스테나이(antistenai)’가 군사적 충돌의 의미로 사용되었고(71회 중 44회),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인(막 15:7, 눅 23:19, 25)” 장면에서 언급된다.
이처럼 이 단어는 인명살상의 가능성이 있는 무장혁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치지 말라,”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진 예수의 비폭력 선언인 것이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28-29.
위의 선언은 거대한 악의 권력 앞에 두려움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도, 거대한 권력과 억압체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거슬리는 말씀일 것이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더더욱 막아내야 하는 말씀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왜 제임스 왕(최초로 영어번역 성경 흠정역을 만든 영국의 왕)의 충실한 학자들이 ‘안티스테나이’를 ‘resist not’ 즉, ‘저항하지 말라’라고 번역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임스 왕은 분명 군주들의 부당한 정책에 맞설 수 있는, ‘굴복’과 ‘싸움’이 아닌 전혀 새로운 ‘예수의 방법’이 있음을 억압되고 소외된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폭력적 억압으로 유지시키는 구조적 악을 뒤엎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효과적이며 새로운 저항’을 마치 악에게 ‘굴복’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에 반하는 이들의 저항정신을 예방하였던 것이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12-14.
그리고 이러한 ‘굴복’은 21세기인 지금도 흔히 보여 지는 기독교인의 비겁한 양태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악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악에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뒤에 나오는 세 가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2) 비폭력 저항의 세 가지 사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원수가 억압하는 만큼 두 배로 사랑해주라는, 실천하기 힘든 말씀으로 이해되며 교회에서도 이 말씀을 가지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공허한 설교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그런 설교를 들은 청중은 사회적 악과 무조건적 사랑 간의 모순에 고민하고, 오히려 악을 외면해버리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에 있어서, 특히 그 당시 억압 받는, 소외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창조적이며 효과적인 저항을 가능케 하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왼손은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고 따라서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선 오른손 손등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사회에서 그 의도는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닌 치욕을 주기 위함으로서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 방법이었는데 즉,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월터윙크, 『예수와 비폭력저항』, 32. 쿰란공동체 에서는 왼손을 사용해 제스처를 했을 경우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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