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란) 이성론과 양심론에 대한 철학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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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심이란) 이성론과 양심론에 대한 철학적 반성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양심론
이성과 양심과의 관계
양심의 정체
-이성론과 양심론에 대한 철학적 노트

본문내용

“위험하다”라고 판단을 하였다면 이는 분명 추론의 행위(이성에 해당)를 한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의 추론 행위는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개념화(보편을 추상하여 냄)는 초월스런 인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들의 추론의 지도 의지가 자애에서 초월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 자기의 이기, 자기의 욕구, 혹은 아류 인간성의 욕구가 그 추론의 행위를 지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개념화 행위에 있어서도 그 보편을 추상하는 행위가 자기의 이기와 자애와 자기의 아류 인간성에서 어떤 용도의 것이냐의 입장에서 추상 행위(보편적 특성을 뽑아내는 행위)를 하여 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추론 행위만이 초월스런 추론의 행위 즉 이성이고, 사람의 개념화 행위만이 존재의 끝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만이 존재의 끝에서 추론하고, 존재의 끝에서 개념화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자애, 모든 이기성에서 초월된 의지와 인격성의 끝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것만이 초월된 의로움, 초월된 어림, 초월된 의연함의 것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 의로움, 어림이 존재의“끝”의 것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생각되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만이 자기의 이기와 자애를 초월하여,“나는 누구인가”“여기는 어디인가?”“지금은 언제인가”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이다. 어떻게 이렇게 인간만이 자기 반성이 가능할 수 있었냐? 인간이 이렇게 자기를 근거에서 반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만이 존재의 지평에 열려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만일 개와 같은 동물들도 이 초월스런 의로움, 초월스런 어림, 초월스런 의연함에 열려 있다면 그들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추론의 행위, 동일한 개념화 행위, 동일한 자기 반성의 행위가 가능할까?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들도 존재의 지평에 열려서 지평선을 바라보며“여기는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지금은 언제인가?”를 물을 수 있는 존재로 바뀔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러면 그동안의 철학이 말해 온 개념화의 이론, 즉 플라톤이 말하는 세상에는 이데아들이 있고 인간은 그 이데아를 알아보기 때문에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는 이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세상에는 보편이 있고 사람은 그 세상의 보편을 알아보는 지성을 타고 났다고 하는 이론(그 지성이라는 이름의 것이 능동지성 Intellectus agens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성이 보편을 알아보니까 개념화가 가능했다는 이론 등은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렇게 세상에는 어떤 지성적인 것이 숨어 있다는 것 또는 인간이 어떤 특별한 지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인간만이 초월스런 개념화 능력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론 등은 다시 반성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여기의 내용이다.
무엇이 소위 보편적인 것인가? 보편적이라는 것의 반대 언어도 있는가? 아마“낯설음”이라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의 반대 이미지일 듯하다.
의로움과 어림 중에서 어림의 뜻이 무엇인가? 바로“자기 아님”“자기 낮춤”의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이 어림의 뜻일 듯하다. 그러므로 이 어림의 이미지만이 낯설지 않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소위 보편이라는 것의 주인은 의로움과 어림과 의연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3개의 언어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원자언어(Atomic language)라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본인의 이성론은 종결을 맺는다.
이 글은 최소한도의 윤문작업도 거치지 않은 거칠은 본인만의 독백의 글이다. 혹시 억지로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불쾌함을 느낀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 끝까지 억지로 읽어 주신 분께는 특별히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2015.5.24. 화창한 일요일 오후 올림픽공원 조그마한 차 속에서. 1941년생. 서울 출생(부모:평안도,황해도). 직업: 치과의사(1965년도 졸업). 서울 송파구 분도치과의원 부원장). 장래희망: 철학전문대학 설립
임 창 선
1941년 서울 회기동 출생
1959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5년 서울 치과대학교 졸업
1965~1968 강원도 원통, 춘천, 속초에서 군생활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44-3 레이크팰리스
상가 A동 305 치과 근무중
본 글은 로고스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밝혀보려고 노력해 본 글입니다.
본인은 사춘기때 병약함에 시달렸고 또 많은 사람들처럼 철학적 회의에 시달렸었습니다. 치과를 전공한 후 군대에 입대하여서는 전방에 고립되어 소외된 기분 속에서 인간 속에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생시절에는 하늘의 이끌림에 의해서 종교적인 체험도 조금 갖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에서 당위를 결정하는 것, 선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저녁 노을의 들판길을 걷다가 내 속에서 그것은“나야”하는 어떤 조그만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그 존재의 착함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차츰차츰 밝혀 보는데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속의 절대 선(善)인 Logos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절대 선(善)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가 이해되어야 인간
속의 존재이해도 가능하게 되고, 인식론의 이해도 가능하게 되며, 해석학과 현상학도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게 되리라고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직접 만나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극한 상항에 떨어져서 절망하여 자아를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게 되는 상항이 발생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자애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바로 눈 앞에 -그 동안 떨고 서 있던-“너”가 보여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여 보려고 애써 본 글입니다.
- 이상 블로그“임창선의 철학 노트” 중의 일부분 -
2015년 7월
치과의사 임 창선
장래희망
철학 전문 학원 설립
  • 가격2,000
  • 페이지수66페이지
  • 등록일2020.01.30
  • 저작시기2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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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12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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