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안락사란?
2. 안락사의 기원과 역사
3. 안락사 찬성,반대 논쟁분석
(1) 찬성입장
(2) 반대입장
4. 해외 선진국의 안락사 허용 및 규제사례
(1) 스위스
(2) 일본
(3) 프랑스
(4) 미국
5. 안락사 대안제안6. 결론 및 느낀점
2. 안락사의 기원과 역사
3. 안락사 찬성,반대 논쟁분석
(1) 찬성입장
(2) 반대입장
4. 해외 선진국의 안락사 허용 및 규제사례
(1) 스위스
(2) 일본
(3) 프랑스
(4) 미국
5. 안락사 대안제안6. 결론 및 느낀점
본문내용
이 바로 호스피스 치료인데 대체로 호스피스 병동(종합병원 내의 특수병동), 호스피스 전문병원, 혹은 가정방문의 형태를 갖게 된다.
호스피스는 모든 환자를 거의 본능적으로 살려 내고자 하는 일반 병원과는 달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How should we then die?)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셈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소화시키며 영적인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호스피스이다. 일반 병원은 죽음을 의미 있게 맞고 준비할 환경이 못된다. 막상 임종 환자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죽음이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극심한 육체적 고통,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정신적 슬픔, 그리고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불안감 등이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사나 자살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와 육체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는 접근이 참된 치료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호스피스 역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운동이 좀 더 활발히 전개되어 존엄한 죽음을 소망 가운데서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호스피스에서 행해지는 간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성적 고통관리이다. 살아있는 동안 편안한 삶의 유지와 증상 완화를 위한 일이라 하겠다.
둘째, 환자의 활동관리다. 평상시와 같이 생활하도록 돕기 위해 환자가 원하면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환자가 집에 가기 원할 때 집에 가도록 하고 원할 때 호스피스에 돌아오도록 한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오는 우울, 걱정, 근심, 자신의 장래에 대한 걱정은 가지고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환자를 쇠약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고로 환자나 가족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호스피스 가족간호는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시를 받고 치료를 제공하는데 참여하도록 용기를 부여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환자를 잘 간호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한다.
셋째, 심리적 요구 충족을 위한 간호이다. 환자 곁에 함께 있어 주며 환자로 하여금 자기 감정을 말하도록 기회를 주는 일 등이 그것이다.
넷째, 영적 요구 충족을 위한 간호이다.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자신과의 만남을 잘 갖도록 영적인 보살핌을 제공한다. 성례는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되며, 환자에게 성경을 읽어 준다든지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해 줌은 환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다섯째, 슬픔을 애도하는 가족, 친지를 위한 간호제공이다.
6. 결론 및 느낀점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을 조금 섞어 금기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에 열중하느라, \'죽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악착 같이 돈 벌고, 집 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너무나 열심히 사느라 죽음에 대한 논의는 자리할 수 없었다. 삶의 에너지를 가득 채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인식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해 함께 크게 떠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 뉴스 등의 언론을 통해서 가끔 \'식물인간인 어머니 9년째 정성으로 돌보아\'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일화를 접하며 \'정말 지극한 사랑이구나.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과 감동을 느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매스컴이 그런 생각과 감정을 유도한 것 일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이 \'효\'라는 인식이 몸 속 어딘가에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부모님에게 존엄하게 돌아가실 기회를 드린다는 것은 불효막심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대해 그 가족 구성원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은 생의 전반에 도사리고 있고,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를 가족 구성원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든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남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윤리적 책임을 지우는 어린 아이나 할 법한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의식을 성숙시켜야 한다.
호스피스는 모든 환자를 거의 본능적으로 살려 내고자 하는 일반 병원과는 달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How should we then die?)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셈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소화시키며 영적인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호스피스이다. 일반 병원은 죽음을 의미 있게 맞고 준비할 환경이 못된다. 막상 임종 환자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죽음이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극심한 육체적 고통,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정신적 슬픔, 그리고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불안감 등이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사나 자살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와 육체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는 접근이 참된 치료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호스피스 역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운동이 좀 더 활발히 전개되어 존엄한 죽음을 소망 가운데서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호스피스에서 행해지는 간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성적 고통관리이다. 살아있는 동안 편안한 삶의 유지와 증상 완화를 위한 일이라 하겠다.
둘째, 환자의 활동관리다. 평상시와 같이 생활하도록 돕기 위해 환자가 원하면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환자가 집에 가기 원할 때 집에 가도록 하고 원할 때 호스피스에 돌아오도록 한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오는 우울, 걱정, 근심, 자신의 장래에 대한 걱정은 가지고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환자를 쇠약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고로 환자나 가족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호스피스 가족간호는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시를 받고 치료를 제공하는데 참여하도록 용기를 부여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환자를 잘 간호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한다.
셋째, 심리적 요구 충족을 위한 간호이다. 환자 곁에 함께 있어 주며 환자로 하여금 자기 감정을 말하도록 기회를 주는 일 등이 그것이다.
넷째, 영적 요구 충족을 위한 간호이다.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자신과의 만남을 잘 갖도록 영적인 보살핌을 제공한다. 성례는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되며, 환자에게 성경을 읽어 준다든지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해 줌은 환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다섯째, 슬픔을 애도하는 가족, 친지를 위한 간호제공이다.
6. 결론 및 느낀점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을 조금 섞어 금기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에 열중하느라, \'죽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악착 같이 돈 벌고, 집 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너무나 열심히 사느라 죽음에 대한 논의는 자리할 수 없었다. 삶의 에너지를 가득 채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인식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해 함께 크게 떠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 뉴스 등의 언론을 통해서 가끔 \'식물인간인 어머니 9년째 정성으로 돌보아\'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일화를 접하며 \'정말 지극한 사랑이구나.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과 감동을 느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매스컴이 그런 생각과 감정을 유도한 것 일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이 \'효\'라는 인식이 몸 속 어딘가에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부모님에게 존엄하게 돌아가실 기회를 드린다는 것은 불효막심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대해 그 가족 구성원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은 생의 전반에 도사리고 있고,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를 가족 구성원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든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남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윤리적 책임을 지우는 어린 아이나 할 법한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의식을 성숙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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