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보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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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산으로 보는 한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626년(인조4년)에 이르기까지 21년에 걸쳐 건물과 절을 다시 지었고, 이 후 1968년에 해체, 복원 하였습니다. 팔상전이라는 명칭은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기 때문인데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모든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 뿐인 목탑이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건물은 각 면 모두 돌계단을 설치한 석조 기단 위에 있으며, 탑신부는 5층으로 1층과 2층은 5칸, 3층과 4층은 3칸, 5층은 2칸씩 이루어져 있고 지붕은 중앙부를 중심으로 5층 옥개는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붕 위에는 상륜부의 장식까지 갖춘 세밀하고 장엄한 형태로, 전체 높이는 22.7m입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마다 다른 특성이 있는데 1층에서부터 4층까지는 지붕의 처마를 아래서부터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구성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세운 다음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건물 안 쪽은 사리를 납치한 공간과 팔상도를 모시는 공간, 마지막으로 부처에게 예배를 올리기 위한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단양신라적성비
[ 丹陽新羅赤城碑 ]
위 비석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국보 제 198호(1979년 5월 22일 지정)로 현재 충북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에 소재되어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신라 장군들 진흥왕의 명령을 받고 전쟁에 나가, 당시가지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격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와 가족 및 주변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할 목적에서 세운 것이 그 유래입니다.
높이 93cm, 윗너비 107cm, 아랫너비 53cm이다.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545년(진흥왕 6) 이전, 550년, 551년 등 각기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며 기존의 문헌자료에 보이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 신라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먼저 자연의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그 위에 직경 2cm 내외의 글자를 음각하는 방식으로 비석을 만들었는데 현재 윗부분은 파손되어 없어졌고, 좌우 양 측면만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비면의 288자와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21자를 합쳐 총 309자만이 남아있으며 얕게 음각하긴 했으나 다행히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예서풍(隷書風)의 해서(楷書)로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쓰이며, 발굴된 석비 주변 일대에서 옛 건물터 및 비편, 기와, 토기조각, 금속제 유품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비문에는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위와 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법주사 석련지
[ 法住寺石蓮池 ]
위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국보 제 64호(1962년 12월 20일 지정)이자 현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에 소재되어 있습니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예전에는 안에 물을 담아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전해지며 8세기경에 제작되어 전체적으로 우수한 비례와 표면의 화려한 장식이 큰 특징으로 꼽힙니다. 특히 표면에 조각 모양은 연꽃을 상징하여 매우 세련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약 2m, 둘레는 6.65m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물입니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의미하며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겼습니다.
현재는 균열되어 철제 꺾쇠로 연결해 놓았으며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어 장식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윗 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으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밑의 난간 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중원 고구려비
[ 中原高句麗碑 ]
위 비석은 고구려의 것으로 국보 제 205호(1981년 3월 18일 지정)이자 현재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소재 되어 있습니다. 5세기경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을 가진 유물입니다. 공식 명칭은 본래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이지만, 신라 시대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 203cm, 폭 55cm, 두께 33cm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으며,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사용하여 4면 모두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발견 당시부터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의 지름은 3∼5cm로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용 중 맨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는 고구려의 왕을 뜻합니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더불어 광개토태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비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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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20.08.03
  • 저작시기201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34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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