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및 윤리사상
목 차
- 행위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
- 어떤 궁극목적이 존재하는가?
- 행복 : 과연 최고선인가?
- 영혼의 해부 : 이성과 욕구
- 본성의 덕
- 중용의 이론
- 동기와 쾌락
- 자의적인, 반자의적인, 자의와 무관한 행동들
- 실천이성의 덕들
- 심사숙고와 실천적 삼단논법
- 의지의 나약함
- 이론이성의 덕들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목 차
- 행위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
- 어떤 궁극목적이 존재하는가?
- 행복 : 과연 최고선인가?
- 영혼의 해부 : 이성과 욕구
- 본성의 덕
- 중용의 이론
- 동기와 쾌락
- 자의적인, 반자의적인, 자의와 무관한 행동들
- 실천이성의 덕들
- 심사숙고와 실천적 삼단논법
- 의지의 나약함
- 이론이성의 덕들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본문내용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론적 인식은 이해에 과학적 인식 능력이 더해져서 형성된다. 지성이 이론적 능력을 잘 발휘하여 이해와 과학적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혜의 덕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지혜가 오직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에만 관련되며 생산적 지식이나 행위와는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의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구성된다. 과학적, 이론적 인식은 진리를, 즉 사물의 일반적 본성이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행위와 관련되는 실천 이성은 선을, 즉 지적인 욕망과 감정의 대상을 목표로 삼는다. 사고나 과학적 인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물들의 영구한 본성을 밝힐 뿐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행위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실천적 지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는 욕구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인식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탐구의 삶)이 최고의 삶의 형태라고 주장하며 또한 이를 통해서 지혜의 덕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이 최고 형태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완전한 삶은 오직 탐구에 헌신하면서 영혼이 지닌 영양이나 욕망의 측면에는 최소한의 주의만 기울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 자신은 위대한 철학자로서 이러한 탐구의 삶, 즉 철학적 사색과 이론적 인식을 추구하는 삶을 선호하였다. 그는 관조의 탁월성이 다양한 탁월성들 중에 최선의 것이며 따라서 관조의 탁월성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최고의 자리에 놓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이성과 인식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정의하는 문제를 인간의 기능을 확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무엇이며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공유하고 있으며, 욕망과 다른 몇몇 감정들을 동물계의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그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오직 이성뿐이다. 그런데 이성의 한 측면은 여전히 우리의 동물적 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실천적 활동에서 드러나는 이성은 감정과 행위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오직 이론 이성과 과학적 인식만이 진정으로 우리는 자연의 나머지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해 준다. 다라서 이런 형태의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기능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다른 어떤 존재도 이해와 연역적인 과학적 인식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행복을 인간의 기능을 구성하는 활동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행복은 곧 탐구 또는 관조임에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은 수많은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공간과 시간상에 존재하는 실재로서 최소한 우리의 사고 작용 또는 추상화의 과정상에서는 두 가지 요소로, 즉 물질적인 기초와 감각적이고 파악 가능한 형상으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다. 개별적 실체의 형상은 바로 그 실체를 그러한 종류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개체의 특성으로 개체가 어떤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를 구별하고 확인해주는 속성인 것이다. 실체의 질료는 그 실체를 구성하는 재료에 해당되며 있는 그대로의 질료에 어떤 형상이 부여됨으로써 구체적이고 특수한, 고유한 어떤 실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실체와 관련해서, 모든 실체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가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가정한다. 이 무언가를 그는 제 일 질료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아직 어떤 형상도 더해지지 않은 질료를 의미한다. 제일 질료의 반대쪽 끝에는 순수 형상이 존재하는데 이 형상은 아직 어떤 질료를 통해서도 실체화되지 않은 형상 자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수 형상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개별적 실체들이 구성하는 자연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모든 개별적인 실체들은 변화하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형상을 잃기도 하고 다른 형상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삶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갓난아이에서 어린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또 노인으로 늙어가면서 이 개인이라는 개별적 실체의 형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뚝뚝한 늙은이가 되어버릴 미래의 내가 빙글거리며 웃고 활발하게 장난치던 과거의 나와 동일한 나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사람은 이미 그가 존재하는 바대로, 바꾸어 말하면 그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한 성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속성은 그가 갓난아이이고 어린이일 때부터 이미 존재하였던 것인데 단지 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변화란 자신이 지닌 잠재성들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며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으로 바꾸어 나가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화는 자신이 잠재적으로 이미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어떤 형상들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 다양한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는데 각각의 시기에 따라 오직 그들 중의 하나씩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간단히 요약함으로써 왜 그가 자아실현의 윤리설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지를 알게 된다. 그에 있어서 도덕적 삶은 어떤 본성에 도달하기 위한 삶, 즉 어떤 느낌과 감정, 행위들이 더해져서 탁월한 지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본성과 행위 그리고 사고에서 드러나는 이런 특성들은 우리를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한 형상을 지닌 특별한 개인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는 이런 형상을 처음부터 잠재적인 것으로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점차 현실적인 존재로 되어감에 따라 이들이 실현된다. 그리고 자신의 잠재성들을 잘 실현한 사람은 곧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지혜가 오직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에만 관련되며 생산적 지식이나 행위와는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의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구성된다. 과학적, 이론적 인식은 진리를, 즉 사물의 일반적 본성이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행위와 관련되는 실천 이성은 선을, 즉 지적인 욕망과 감정의 대상을 목표로 삼는다. 사고나 과학적 인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물들의 영구한 본성을 밝힐 뿐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행위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실천적 지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는 욕구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인식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탐구의 삶)이 최고의 삶의 형태라고 주장하며 또한 이를 통해서 지혜의 덕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이 최고 형태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완전한 삶은 오직 탐구에 헌신하면서 영혼이 지닌 영양이나 욕망의 측면에는 최소한의 주의만 기울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 자신은 위대한 철학자로서 이러한 탐구의 삶, 즉 철학적 사색과 이론적 인식을 추구하는 삶을 선호하였다. 그는 관조의 탁월성이 다양한 탁월성들 중에 최선의 것이며 따라서 관조의 탁월성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최고의 자리에 놓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이성과 인식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정의하는 문제를 인간의 기능을 확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무엇이며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공유하고 있으며, 욕망과 다른 몇몇 감정들을 동물계의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그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오직 이성뿐이다. 그런데 이성의 한 측면은 여전히 우리의 동물적 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실천적 활동에서 드러나는 이성은 감정과 행위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오직 이론 이성과 과학적 인식만이 진정으로 우리는 자연의 나머지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해 준다. 다라서 이런 형태의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기능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다른 어떤 존재도 이해와 연역적인 과학적 인식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행복을 인간의 기능을 구성하는 활동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행복은 곧 탐구 또는 관조임에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은 수많은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공간과 시간상에 존재하는 실재로서 최소한 우리의 사고 작용 또는 추상화의 과정상에서는 두 가지 요소로, 즉 물질적인 기초와 감각적이고 파악 가능한 형상으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다. 개별적 실체의 형상은 바로 그 실체를 그러한 종류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개체의 특성으로 개체가 어떤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를 구별하고 확인해주는 속성인 것이다. 실체의 질료는 그 실체를 구성하는 재료에 해당되며 있는 그대로의 질료에 어떤 형상이 부여됨으로써 구체적이고 특수한, 고유한 어떤 실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실체와 관련해서, 모든 실체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가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가정한다. 이 무언가를 그는 제 일 질료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아직 어떤 형상도 더해지지 않은 질료를 의미한다. 제일 질료의 반대쪽 끝에는 순수 형상이 존재하는데 이 형상은 아직 어떤 질료를 통해서도 실체화되지 않은 형상 자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수 형상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개별적 실체들이 구성하는 자연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모든 개별적인 실체들은 변화하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형상을 잃기도 하고 다른 형상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삶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갓난아이에서 어린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또 노인으로 늙어가면서 이 개인이라는 개별적 실체의 형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뚝뚝한 늙은이가 되어버릴 미래의 내가 빙글거리며 웃고 활발하게 장난치던 과거의 나와 동일한 나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사람은 이미 그가 존재하는 바대로, 바꾸어 말하면 그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한 성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속성은 그가 갓난아이이고 어린이일 때부터 이미 존재하였던 것인데 단지 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변화란 자신이 지닌 잠재성들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며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으로 바꾸어 나가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화는 자신이 잠재적으로 이미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어떤 형상들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 다양한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는데 각각의 시기에 따라 오직 그들 중의 하나씩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간단히 요약함으로써 왜 그가 자아실현의 윤리설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지를 알게 된다. 그에 있어서 도덕적 삶은 어떤 본성에 도달하기 위한 삶, 즉 어떤 느낌과 감정, 행위들이 더해져서 탁월한 지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본성과 행위 그리고 사고에서 드러나는 이런 특성들은 우리를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한 형상을 지닌 특별한 개인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는 이런 형상을 처음부터 잠재적인 것으로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점차 현실적인 존재로 되어감에 따라 이들이 실현된다. 그리고 자신의 잠재성들을 잘 실현한 사람은 곧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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