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연보쓰기
2. 자서전의 한 단락쓰기
2. 자서전의 한 단락쓰기
본문내용
나는 매장에서 대부분이 업무를 보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에는 아내는 집에서 쉬거나 매장에 나와도 매장에서 애를 돌보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면, 매장의 바닥은 상당히 매끈매끈했고, 온돌바닥으로 손님들이 좌식으로 쉬고 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아이가 처음에 매장으로 왔을 때에는 매장에서 제일 좋은 이불 위에다가 눕히고 손님들이 올 때마다 웃어주는 모습에 고맙기도 했다. 매장에 방문하는 단골 손님들은 아이를 보면서 즐거워했으나 아이가 못생겼는데 왜 그리 좋아서 들고 이 가게, 저 가게 왔다갔냐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아이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업은 잘 되고 있었지만 결국 직원들을 관리하고 매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했고 아내도 간간히 나와서 매장으로 왔어야 했는데 크게 울지도 않고 웃어주는 아이를 보고 고마워했다. 오히려 침구류를 사러 오는 어르신들은 아이를 보면서 자기 며느리, 딸이 손자 하나 낳아주었으면 좋겠다며 아이를 눕혔던 이불을 구매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우리 매장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겨울이 찾아왔다. 가을 무렵에 태어난 아이가 100일이 될 무렵 12월 말이었다. 그 당시에 크리스마스 기간이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면서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잔잔히 눈 밟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를 꼭 끌어안아준 것 같다. 남들이 말하는 백일잔치를 해줄 정도로 풍요롭지는 않았다. 다만 첫돌은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생긴 것도 있었고 사업체를 꾸리면서 자리를 잡는 것에도 긴 시간이 필요로 했다. 특히나 그 당시에는 이주에 대해서 크게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였기에 아내와의 결혼식은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하기도 했다.
다만, 적어도 내 아이와 우리 가족이 굶지 않았고 다른 가족들 또한 잘 지내고 있었던 그 시기가 가장 좋았다. 형님들, 누님도 잘 지냈고 다들 가정을 꾸리면서 잘 지내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나 또한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못내 부모님은 나에게 뭐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내 아들이 이런 일을 했기에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학도 나오지 않았던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다만,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1988년은 내 삶에 있어서 성숙해짐에 가까워진 시기라고 본다. 만약에 돌아간다고 해도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가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그만큼, 그 시기의 추억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아내도 웃으면서 지냈고, 나 또한 웃으면서 지내면서 지난 날의 추억을 기억하면 이불집을 하던 초창기의 시절을 가장 추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고, 사회에 나가서 아내와 혼인신고서를 낸 시기가 1988년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하고 얼렁뚱땅 결혼을 해버린 우리 부부를 축복하듯 아이가 태어났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더 강인해져야만 했고,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니 그만큼 자부심도 늘어난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긴 이후에는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도 완전히 없어졌다.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도 생각을 했지만 아이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강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간과 기간이 없었다면, 이전의 기억과 군생활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에 술을 줄이고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내가 가장 성숙해지는 것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 해라고 본다.
이 당시에는 아이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업은 잘 되고 있었지만 결국 직원들을 관리하고 매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했고 아내도 간간히 나와서 매장으로 왔어야 했는데 크게 울지도 않고 웃어주는 아이를 보고 고마워했다. 오히려 침구류를 사러 오는 어르신들은 아이를 보면서 자기 며느리, 딸이 손자 하나 낳아주었으면 좋겠다며 아이를 눕혔던 이불을 구매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우리 매장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겨울이 찾아왔다. 가을 무렵에 태어난 아이가 100일이 될 무렵 12월 말이었다. 그 당시에 크리스마스 기간이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면서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잔잔히 눈 밟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를 꼭 끌어안아준 것 같다. 남들이 말하는 백일잔치를 해줄 정도로 풍요롭지는 않았다. 다만 첫돌은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생긴 것도 있었고 사업체를 꾸리면서 자리를 잡는 것에도 긴 시간이 필요로 했다. 특히나 그 당시에는 이주에 대해서 크게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였기에 아내와의 결혼식은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하기도 했다.
다만, 적어도 내 아이와 우리 가족이 굶지 않았고 다른 가족들 또한 잘 지내고 있었던 그 시기가 가장 좋았다. 형님들, 누님도 잘 지냈고 다들 가정을 꾸리면서 잘 지내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나 또한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못내 부모님은 나에게 뭐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내 아들이 이런 일을 했기에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학도 나오지 않았던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다만,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1988년은 내 삶에 있어서 성숙해짐에 가까워진 시기라고 본다. 만약에 돌아간다고 해도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가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그만큼, 그 시기의 추억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아내도 웃으면서 지냈고, 나 또한 웃으면서 지내면서 지난 날의 추억을 기억하면 이불집을 하던 초창기의 시절을 가장 추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고, 사회에 나가서 아내와 혼인신고서를 낸 시기가 1988년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하고 얼렁뚱땅 결혼을 해버린 우리 부부를 축복하듯 아이가 태어났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더 강인해져야만 했고,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니 그만큼 자부심도 늘어난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긴 이후에는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도 완전히 없어졌다.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도 생각을 했지만 아이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강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간과 기간이 없었다면, 이전의 기억과 군생활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에 술을 줄이고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내가 가장 성숙해지는 것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 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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