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Ι. 선정이유
Ⅱ. 가우가멜라 전투
1. 전투의 배경
2. 전투의 전말
1) 전투 전
2) 전투 개시
3. 전투승인 분석
4. 전투의 역사적 평가
1) 전투 이후 상황
2) 전투에 대한 평가
Ⅲ. 참고문헌
Ⅱ. 가우가멜라 전투
1. 전투의 배경
2. 전투의 전말
1) 전투 전
2) 전투 개시
3. 전투승인 분석
4. 전투의 역사적 평가
1) 전투 이후 상황
2) 전투에 대한 평가
Ⅲ.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리스 연합군이 초정예군사라는 것이다. 본토에 있을 때부터 페르시아와 수많은 접전을 벌여 승리한 군사이며, 페르시아로 넘어올 때도 초기부터 이수스 전투 ~ 소아시아 및 이집트 정복까지 함께한 군사이기 때문이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막강한 기병대와 근위대, 용병 등을 제외하면 다수가 징집병이었기에 기세싸움에서 밀리면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전차부대를 너무나 쉽게 소모시킨 것이 패인이라 생각한다. 당시 전차는 지금으로 따지면 탱크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기동력, 우수한 방어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를 모는 군사들 역시 최정예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전차부대를 날개를 지원해주는 용도로 썼다면, 알렉산더가 중앙을 돌파하기 전, 그리스 군의 좌익이나 우익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세 번째, 대군이라고 하여 3.6km에 포진시킨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과거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가 대군을 길게 포진시켜서 패전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군이어도 길게 포진시키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군사의 일부를 떼서 그리스군의 후방에 배치시켰다면, 그리스군의 날개가 버틸 수 있었을까?
네 번째, 다리우스 3세가 도주했기에 패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자신만의 지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은 왕이 있었기에 왕이 지휘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의 기병과 중장보병이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오자 도주를 선택하였다. 만약 그가 병사를 최대한 모아 버텼다면, 십 수만의 달하는 징집병이라도 쉽게 뚫지 못했을 것이며, 그를 지키는 근왕대까지 투입해서 버텼다면, 오히려 무너지는 것은 그리스 좌우익날개였을 것이고 알렉산더는 포위되어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전투의 역사적 평가
1) 전투 이후 상황
전투의 이후,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이미 군사는 괴멸상태였기에 암울함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리우스는 다시 병력을 모아보려고 했으나 페르시아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다리우스는 감금당하게 된다. 이에 다리우스의 사촌인 베수스가 다리우스를 감금시키나, 곧바로 마케도니아 군이 쳐들어온다. 베수스는 다리우스를 찌르고 달아나는데, 다리우스는 곧 죽으며 베수스 역시 머지않아 붙잡혀 죽음을 맞이한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다리우스가 자신에게 왕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말하며, 페르시아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 효과는 제법 먹혀들어가, 페르시아의 중앙을 대부분 장악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의 예법을 따르고 페르시아 출신 관료를 다수 등용하였으며 페르시아 여인들과 마케도니아 군인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서양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자랑했던 그리스와 동양에서 중국과 함께 뛰어난 문명이었던 페르시아 문화, 이집트 문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자체로써 의의가 깊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후 알렉산더가 급사하게 되면서 제국은 분열
두 번째, 전차부대를 너무나 쉽게 소모시킨 것이 패인이라 생각한다. 당시 전차는 지금으로 따지면 탱크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기동력, 우수한 방어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를 모는 군사들 역시 최정예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전차부대를 날개를 지원해주는 용도로 썼다면, 알렉산더가 중앙을 돌파하기 전, 그리스 군의 좌익이나 우익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세 번째, 대군이라고 하여 3.6km에 포진시킨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과거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가 대군을 길게 포진시켜서 패전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군이어도 길게 포진시키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군사의 일부를 떼서 그리스군의 후방에 배치시켰다면, 그리스군의 날개가 버틸 수 있었을까?
네 번째, 다리우스 3세가 도주했기에 패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자신만의 지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은 왕이 있었기에 왕이 지휘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의 기병과 중장보병이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오자 도주를 선택하였다. 만약 그가 병사를 최대한 모아 버텼다면, 십 수만의 달하는 징집병이라도 쉽게 뚫지 못했을 것이며, 그를 지키는 근왕대까지 투입해서 버텼다면, 오히려 무너지는 것은 그리스 좌우익날개였을 것이고 알렉산더는 포위되어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전투의 역사적 평가
1) 전투 이후 상황
전투의 이후,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이미 군사는 괴멸상태였기에 암울함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리우스는 다시 병력을 모아보려고 했으나 페르시아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다리우스는 감금당하게 된다. 이에 다리우스의 사촌인 베수스가 다리우스를 감금시키나, 곧바로 마케도니아 군이 쳐들어온다. 베수스는 다리우스를 찌르고 달아나는데, 다리우스는 곧 죽으며 베수스 역시 머지않아 붙잡혀 죽음을 맞이한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다리우스가 자신에게 왕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말하며, 페르시아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 효과는 제법 먹혀들어가, 페르시아의 중앙을 대부분 장악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의 예법을 따르고 페르시아 출신 관료를 다수 등용하였으며 페르시아 여인들과 마케도니아 군인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서양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자랑했던 그리스와 동양에서 중국과 함께 뛰어난 문명이었던 페르시아 문화, 이집트 문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자체로써 의의가 깊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후 알렉산더가 급사하게 되면서 제국은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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