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누정의 역사
2. 누정이 가장 활발하게 지어졌던 시기 – 조선시대
3. 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권역별 특성
1) 동호 일대
(1) 제천정
(2) 압구정
2) 남호 일대
(1) 용양봉저정
(2) 효사정
3) 서호 일대
4. 누정에 대한 내 견해
참고문헌
2. 누정이 가장 활발하게 지어졌던 시기 – 조선시대
3. 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권역별 특성
1) 동호 일대
(1) 제천정
(2) 압구정
2) 남호 일대
(1) 용양봉저정
(2) 효사정
3) 서호 일대
4. 누정에 대한 내 견해
참고문헌
본문내용
자를 세워 한강변 풍광을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 누정조에 “효사정은 노량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 노한의 별장이다. 노한은 그의 모친을 장사하고 시려하였는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서러워하던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정자 이름을 효사(孝思)라 하였다.” 이처럼 효사정은 다른 누정과는 다르게 풍류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쉬던 노한의 감정이 가득 서려있는 곳이다. 후손들 역시 풍류보다 효를 주로 행하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
3) 서호 일대
당시 서호는 한강의 모든 물류가 모이는 곳이었기에 상당히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궁궐과도 상당히 가까워서 왕실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서호 일대 누정 위치(망원정, 영복정, 담담정)는 아래와 같다.
〃담담정은 마포 북쪽언덕, 용산과 마포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던 정자였다. 『동국여지비고』「누정조」에 ‘담담정은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세종의 셋째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 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時文)과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담담정은 안평대군이 세운 후 계유정난 전 까지 그와 관계된 사람들이 자주 모이곤 했던 장소였다.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계유정난 이후에 안평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고 나서 신숙주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영복정은 양녕대군, 세조와 관계가 있으며, 망원정은 효령대군·월산대군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주로 조선 초 왕실과 관계된 누정이 있는 곳이 서호이다.
4. 누정에 대한 내 견해
일반인들은 ‘누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누정에 대해서 들어본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누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준다면 아마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현재 사람들의 상당수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시문화 등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누정을 단순히 놀고 먹는 장소로 이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정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 누정에서 수많은 국가 안건들이 처리되었을 것이고 외교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누정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시대결을 펼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문화의 장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누정의 역사를 통해 조선 초기 집권층이 바뀌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한명회의 압구정이나 안평대군의 담담정이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누정이 상당 부분 사라져서 연구가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복원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하기에 연구가 속개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본다.
■ 참고문헌
이상민, 2019,「충청북도 누정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세명대학교 대학원원 건설공학과 석사학위논문』.
김선화, 2014,「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환경자원학과 박사학위논문』.
3) 서호 일대
당시 서호는 한강의 모든 물류가 모이는 곳이었기에 상당히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궁궐과도 상당히 가까워서 왕실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서호 일대 누정 위치(망원정, 영복정, 담담정)는 아래와 같다.
〃담담정은 마포 북쪽언덕, 용산과 마포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던 정자였다. 『동국여지비고』「누정조」에 ‘담담정은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세종의 셋째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 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時文)과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담담정은 안평대군이 세운 후 계유정난 전 까지 그와 관계된 사람들이 자주 모이곤 했던 장소였다.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계유정난 이후에 안평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고 나서 신숙주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영복정은 양녕대군, 세조와 관계가 있으며, 망원정은 효령대군·월산대군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주로 조선 초 왕실과 관계된 누정이 있는 곳이 서호이다.
4. 누정에 대한 내 견해
일반인들은 ‘누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누정에 대해서 들어본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누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준다면 아마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현재 사람들의 상당수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시문화 등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누정을 단순히 놀고 먹는 장소로 이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정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 누정에서 수많은 국가 안건들이 처리되었을 것이고 외교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누정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시대결을 펼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문화의 장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누정의 역사를 통해 조선 초기 집권층이 바뀌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한명회의 압구정이나 안평대군의 담담정이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누정이 상당 부분 사라져서 연구가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복원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하기에 연구가 속개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본다.
■ 참고문헌
이상민, 2019,「충청북도 누정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세명대학교 대학원원 건설공학과 석사학위논문』.
김선화, 2014,「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환경자원학과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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