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로봇에 대한 창의성을 제공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중 처음에 시계나 나사 등 여러 가지 기계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 다음 장면이 노동자들이 근무교대를 하는 장면이었다. 근무교대를 하는 사람들은 밝은 배경과는 다르게 고개를 모두 숙이고 있으며 검은 색의 똑같은 복장을 하고선 어떠한 표정을 짓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은 채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지상세계의 부유한 지도 계층들의 놀이와 타락된 삶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장면에서 지도계층 사람들은 모두 웃거나 장난을 치고 있으며 밝은 배경에 밝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색과 명암의 대비를 통하여 지상세계와 지하세계의 모습의 차이를 극대화하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공장 속에서 마치 기계들의 하나의 부품처럼 일관적이고 똑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본주의적인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며 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동요도 없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바로 다른 사람들로 대체되어 일을 이어나가는 장면은 인간성이 말소되어 사람보다는 일이 중요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더욱 깨닫도록 도움을 준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 계층이 분화되고 계층 사이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계층에 따라 교육 수준과 지식의 수준에 격차가 벌어지며 그에 따라 생활약식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배계층과 노동자계층을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할 만한 중재자가 없다는 것을 원인으로 보았다. 메트로폴리스를 지배하는 머리인 지배계층과 메트로폴리스가 여러 가지 기능을 하도록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손인 노동자 계층 사이의 심장인 중재자가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중재자 역할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계층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공감할 수 있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레더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하루를 대신 살아 일을 해봄으로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는 것은 너무 혹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버지인 조 프레더슨에게 말을 하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제기하였다. 즉, 이러한 프레더의 노력은 노동자계층의 심리와 상황을 지배계층에게 알려줌으로써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중재자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더가 노동자의 하루를 대신 살아보며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아버지 10시간 노동은 너무 혹독합니다!”하는 장면은 자본주의 사상에 놓여 있는 현대 우리나라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급 사회를 타파하기 위하여 혁명을 실시하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층인 프레더의 중재에 의해서 아무런 결과 없이 힘없게 막을 내렸다는 결과는 계급 사회를 비판하는 감독의 모습에 비하여 다소 부족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 처음에 시계나 나사 등 여러 가지 기계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 다음 장면이 노동자들이 근무교대를 하는 장면이었다. 근무교대를 하는 사람들은 밝은 배경과는 다르게 고개를 모두 숙이고 있으며 검은 색의 똑같은 복장을 하고선 어떠한 표정을 짓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은 채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지상세계의 부유한 지도 계층들의 놀이와 타락된 삶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장면에서 지도계층 사람들은 모두 웃거나 장난을 치고 있으며 밝은 배경에 밝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색과 명암의 대비를 통하여 지상세계와 지하세계의 모습의 차이를 극대화하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공장 속에서 마치 기계들의 하나의 부품처럼 일관적이고 똑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본주의적인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며 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동요도 없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바로 다른 사람들로 대체되어 일을 이어나가는 장면은 인간성이 말소되어 사람보다는 일이 중요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더욱 깨닫도록 도움을 준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 계층이 분화되고 계층 사이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계층에 따라 교육 수준과 지식의 수준에 격차가 벌어지며 그에 따라 생활약식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배계층과 노동자계층을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할 만한 중재자가 없다는 것을 원인으로 보았다. 메트로폴리스를 지배하는 머리인 지배계층과 메트로폴리스가 여러 가지 기능을 하도록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손인 노동자 계층 사이의 심장인 중재자가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중재자 역할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계층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공감할 수 있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레더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하루를 대신 살아 일을 해봄으로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는 것은 너무 혹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버지인 조 프레더슨에게 말을 하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제기하였다. 즉, 이러한 프레더의 노력은 노동자계층의 심리와 상황을 지배계층에게 알려줌으로써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중재자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더가 노동자의 하루를 대신 살아보며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아버지 10시간 노동은 너무 혹독합니다!”하는 장면은 자본주의 사상에 놓여 있는 현대 우리나라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급 사회를 타파하기 위하여 혁명을 실시하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층인 프레더의 중재에 의해서 아무런 결과 없이 힘없게 막을 내렸다는 결과는 계급 사회를 비판하는 감독의 모습에 비하여 다소 부족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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