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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작가는 인간 신체 활동 자체를 이용한 원초적인 작품 행위를 목표했으며, 결국 그에게 있어 세계는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한 드로잉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드로잉의 방법> 이후로 그는 <신체 드로잉 76-1~7>까지 일련의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그 신체적 행위의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작은 궁극적으로 작품보다는 그것을 완성시킨 신체에 대한 집중을 가능하게 하며, 그 위치 및 구속 정도를 달리한 행위가 평면에 남는 작업이 결합된 행위 예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혜승,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미학 예술학 연구 Vol.59, 2020,pp121-122
현대 미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행위 예술은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신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작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차이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이건용의 <드로잉의 방법>에 비교하여 예술가의 행위를 극도로 제한하고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면서 형성하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건용의 <드로잉의 방법>은 몸을 도구로써 사용하는 것을 강조하여 그것을 회화 예술과 결합함으로써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작가의 행위 예술은 그 자체가 예술인 것으로,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같이 가시적인 물질로서 존재한다고 하기 보다는 작가가 수행하는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한 차원 더 추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그것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를 표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게 수행되며, 궁극적으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를 점차 더 좁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이건용, <드로잉의 방법>, 1976
[참고문헌]
강혜승 ( Hea-seung Kang ). 2020.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미학 예술학 연구, 59(0): 107-136
<드로잉의 방법> 이후로 그는 <신체 드로잉 76-1~7>까지 일련의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그 신체적 행위의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작은 궁극적으로 작품보다는 그것을 완성시킨 신체에 대한 집중을 가능하게 하며, 그 위치 및 구속 정도를 달리한 행위가 평면에 남는 작업이 결합된 행위 예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혜승,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미학 예술학 연구 Vol.59, 2020,pp121-122
현대 미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행위 예술은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신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작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차이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이건용의 <드로잉의 방법>에 비교하여 예술가의 행위를 극도로 제한하고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면서 형성하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건용의 <드로잉의 방법>은 몸을 도구로써 사용하는 것을 강조하여 그것을 회화 예술과 결합함으로써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작가의 행위 예술은 그 자체가 예술인 것으로,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같이 가시적인 물질로서 존재한다고 하기 보다는 작가가 수행하는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한 차원 더 추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그것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를 표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게 수행되며, 궁극적으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를 점차 더 좁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이건용, <드로잉의 방법>, 1976
[참고문헌]
강혜승 ( Hea-seung Kang ). 2020.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미학 예술학 연구, 59(0): 10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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