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H마트에서 울다
울긴 왜 울어
쌍꺼풀
뉴욕 스타일
와인이 어딨지?
암흑 물질
약
언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살아가기와 죽어가기
당신이란 사람에게 황겁할 정도로 도저하지 않은 점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법과 질서
묵직한 손
사랑스러운
내 사랑은 계속될 거예요
잣죽
작은 도끼
망치 여사와 나
김치냉장고
커피 한 잔
울긴 왜 울어
쌍꺼풀
뉴욕 스타일
와인이 어딨지?
암흑 물질
약
언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살아가기와 죽어가기
당신이란 사람에게 황겁할 정도로 도저하지 않은 점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법과 질서
묵직한 손
사랑스러운
내 사랑은 계속될 거예요
잣죽
작은 도끼
망치 여사와 나
김치냉장고
커피 한 잔
본문내용
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곡 책 한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269)
그 분은 왜 나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벼렸을까? 엄마의 미술 선생님은 엄마가 돌아가셨단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편재를 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글이 아니라 영어로 쓴 까닭은 뭘까? 혹시 날 위해 번역을 한 걸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어찌어찌 내가 엄마를 흡수한 것처럼, 이제 엄마가 내 일부라도 된 양 느꼈고, 적어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도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말하자면 내가 자기 말을 들어줄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81)
나는 엄마가 지난 한 해 동안 미술 수업을 받으러 다닌 사실을 알았고 문자로 몇몇 스케치 사진까지 받곤 했지만, 이렇게 많은 그림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283-284)
내 사랑은 계속될 거예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 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달느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286-287)
잣죽
잣죽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배움의 문턱에서 입장을 거부당했기에 나는 은연중에 그 요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잣죽이 몹시 먹고 싶어졌다. 잣죽은 계씨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가장 자주 해준 메뉴이자 엄마가 먹을 수 있던 몇 안 되는 음식이었다.(317)
이것이 내가 원한 전부였다. 몇 날 며칠을 화려하고 값비싼 고기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함을 달리한 갖가지 감자 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까달았다. 내가 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것.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개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 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 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319-320)
작은 도끼
엄마는 나미 이모가 점쟁이를 찾아간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점쟁이 말이,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가만히 서서 누구든 자기 아래에 눕는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 줄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하지만 매양 발밑에서 작은 도끼가 밑동을 찍으면서 천천히 이모의 기운을 빼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그 작은 도끼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모는 자기 가정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사적인 공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모는 유일하게 남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328-329)
김치냉장고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 결실을 맺지 못한 열망, 처음으로 읽은 책.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난 과정, 온갖 불안과 작은 승리. 엄마는 비할 데 없는 관심으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371)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 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니 표식을 단서로 ㄴ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속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쌉싸름한 일인지. 자식이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 보관인을 기록하는 일이. (371-372)
나는 발효가 통제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배추는 놔두면 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설탕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달콤한 맛이 나게 된다. 요컨대 발효는 시간 속에 존재해 변화한다. 그러니 발효가 완전히 통제된 죽음인 건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니까. (372)
커피 한 잔
이모가 터치스크린 위로 차트를 죽 훑어 내리더니 커피 한 잔을 찾았다. 심벌즈를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기타가 바통을 이어받아 즉흥연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멜로디 라인이 나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어렸을 때 다 같이 간 노래방에서 엄마와 이모가 듀엣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긴 전주가 끝날 무렵 화면 위로 천천히 가사가 올라왔다. 이모는 하나 더 준비돼 있던 무선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이모는 내 손을 잡아 나를 화면 앞으로 끌고 가서 내 얼굴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396)
그 분은 왜 나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벼렸을까? 엄마의 미술 선생님은 엄마가 돌아가셨단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편재를 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글이 아니라 영어로 쓴 까닭은 뭘까? 혹시 날 위해 번역을 한 걸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어찌어찌 내가 엄마를 흡수한 것처럼, 이제 엄마가 내 일부라도 된 양 느꼈고, 적어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도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말하자면 내가 자기 말을 들어줄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81)
나는 엄마가 지난 한 해 동안 미술 수업을 받으러 다닌 사실을 알았고 문자로 몇몇 스케치 사진까지 받곤 했지만, 이렇게 많은 그림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283-284)
내 사랑은 계속될 거예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 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달느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286-287)
잣죽
잣죽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배움의 문턱에서 입장을 거부당했기에 나는 은연중에 그 요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잣죽이 몹시 먹고 싶어졌다. 잣죽은 계씨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가장 자주 해준 메뉴이자 엄마가 먹을 수 있던 몇 안 되는 음식이었다.(317)
이것이 내가 원한 전부였다. 몇 날 며칠을 화려하고 값비싼 고기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함을 달리한 갖가지 감자 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까달았다. 내가 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것.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개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 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 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319-320)
작은 도끼
엄마는 나미 이모가 점쟁이를 찾아간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점쟁이 말이,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가만히 서서 누구든 자기 아래에 눕는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 줄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하지만 매양 발밑에서 작은 도끼가 밑동을 찍으면서 천천히 이모의 기운을 빼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그 작은 도끼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모는 자기 가정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사적인 공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모는 유일하게 남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328-329)
김치냉장고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 결실을 맺지 못한 열망, 처음으로 읽은 책.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난 과정, 온갖 불안과 작은 승리. 엄마는 비할 데 없는 관심으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371)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 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니 표식을 단서로 ㄴ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속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쌉싸름한 일인지. 자식이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 보관인을 기록하는 일이. (371-372)
나는 발효가 통제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배추는 놔두면 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설탕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달콤한 맛이 나게 된다. 요컨대 발효는 시간 속에 존재해 변화한다. 그러니 발효가 완전히 통제된 죽음인 건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니까. (372)
커피 한 잔
이모가 터치스크린 위로 차트를 죽 훑어 내리더니 커피 한 잔을 찾았다. 심벌즈를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기타가 바통을 이어받아 즉흥연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멜로디 라인이 나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어렸을 때 다 같이 간 노래방에서 엄마와 이모가 듀엣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긴 전주가 끝날 무렵 화면 위로 천천히 가사가 올라왔다. 이모는 하나 더 준비돼 있던 무선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이모는 내 손을 잡아 나를 화면 앞으로 끌고 가서 내 얼굴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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