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와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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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목차

1. 교재 제13장, 제14장, 제15장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 시대 여러 의례 생활을 서술하기(25점)

1, 전통 의례에 대한 이해
2, 의례와 생활
3, 자신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 가정하여 생활하면서 겪는, 볼 수 있는 의례들을 적을 것. 의례 종류, 시행 이유, 모습 등을 기록
4, 의례를 진행하면서 드는‘나’의 생각은 어떤지 적어줄 것.

2. 교재 제9장, 제10장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양반의 일생 서술하기

참고문헌

본문내용

본이념인 유학을 가르치는 기초적 과정의 성격을 지니며 서민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최고 교육행정 기관은 예조였으며, 예조에서는 성균관(成均館), 사부(四部)학당 등 직할 학교를 유지 운영하는 일을 관여하였다. 지방에서는 도 관찰사 밑에 육방(六房)의 하나인 예방(禮房)이 있어 교육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교육 기관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와 사부(四部)학당,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이 있었고, 사학(私學)에는 서당(書堂)과 서원(書院)이 있었다. 즉 서당(書堂)과 서원(書院)은 개개인의 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향교(鄕校)와 사부학당(四部學堂), 성균관(成均館)은 국가에 의해서 정책적으로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서당에서는 이미 가정에서 깨친 천자문을 바탕으로 동몽선습, 사서오경을 익히면서 문리를 익혔다. 훈장인 진겸 선생께서는 내게는 외종조부가 되시는 분으로 한양에서 오랜 공직생활을 거치고 귀향하여 노부모를 모시면서 후학을 양성한 분으로 인자하고 관후한 선비의 모습이셨다. 당시 서당의 설립은 설립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훈장이 독자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훈장자영서당(訓長自營書堂)이 있었고, 마을에서 가세가 넉넉한 사람이 자기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단독으로 초청하여 경비 일체를 담당해가는 유지독영서당(有志獨營書堂)도 있었다. 서당(書堂)은 대체로 훈장(訓長)과 접장(接長), 생도(生徒)로 구성되어 있었다. 훈장(訓長)은 주석이나 언해를 참고하여 경서의 뜻만 파악하는 정도면 충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학식이 높고 덕망이 높은 선비들은 관직에 진출하거나 지방에서는 향교나 서원의 교관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양반가의 초등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가정에서 한문해독의 능력을 갖춘 다음 서당에서 기초문리를 익히고 향교에서 진사시 입격을 위한 공부를 계속하였다. 조선시대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 생원, 진사시 등이 있었으며 문과와 무관은 문무 분야의 전문 관료인 문관과 무관으로 등용되는 관문이었고 잡과는 역과(통역관)·의과(의사)·음양과(천문학자)·율과(법률가) 등 전문직 관료를 등용하는 방책이었다.
나는 17세까지 서당에서 공부하고 20세까지 향교에서 진사 시 준비를 하였는데 몇 차례 낙방한 후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교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시는 자격을 부여하는 일종의 자격시험으로, 성균관 입학이 가능했으며, 관료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과거 합격자 발표 후 합격 증서를 주는 공식행사 방방이 진행되었는데, 왕께서는 꽃, 술, ·음식 등을 하사하였고 진사시 합격자는 백패를 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식년시와 증광시만 시행하였는데, 시험과목이나 절차는 동일하며, 초시와 회시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조선 관료의 과거 등용 코스는 생원시(사서의, 오경의), 진사시(시와 부)를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 응시 자격을 얻어 대과에 응시하여 입격하여 관료로 등용되었으며 문과는 시험의 형식과 시행 사유에 따라 식년시·증광시·별시·정시·알성시 등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성균관 입교 후 7년이 지나 주상 전하의 대군 득남을 축하하여 비정기적으로 열린 문과 증광시에 입격하게 되었다.
선배급제자들에게 예문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 등에서 면신례를 시행하였는데, 영광의 의례였으며 합격자의 고향에서는 도문연이 진행되었는데 합격증서인 홍패와 어사화를 받아들고 금의환향한 나를 개인과 가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고을의 경사로 여겨졌으며 친척지인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벼슬살이의 시작하게 되었다. 나처럼 과거를 통해 입사한 이들도 있었으나 고위직인 부친의 음서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나와 음관인 김00은 수습기간에 정 7품인 승문원, 승정원 주서로 배치되어 근무하였다. 승정원 주서는 기록을 담당하여 청요직의 하나로 간주되어 관리들의 영예로운 자리 중 하나였다. 근무 중 숙직, 5일 근무하고 2일 쉬는 일정이 이어졌다.
면신례의 고초는 기본이고 관복마련부터 면신례까지의 모든 비용을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해서 집에 겨우 있던 소 한 마리를 팔아 충당해야했다. 음관은 면신례 없이 근무하는 것이 큰 비용을 치르며 시작하는 나 같은 이들에 비해 부당하다고 여겨 불쾌했으나 나와 근무한 음관 김00은 아버지가 판서를 역임한 명문가 자제이나 대체로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 금방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우리와 같은 관원들의 직장생활은 크게 근무와 휴가 두 가지가 전부였는데 해가 뜰 때 출근하여 해가 질 때 퇴근하며, 매일 밤 당번제 숙직을 하면서 근무했다. 다만 매일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내지 6개월 근무하고 그 외에는 고향에서 휴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6품 이상은 900일, 7품 이하는 450일 근무 후 다른 관서로 이동이 가능했는데 각 계절의 첫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녹봉 을 지급하였다. 각자 품계에 따라 18등급으로 분류하여 쌀, 현미, 조, 보리, 콩, 명주, 마포, 저화 등이 지급되었으며 계절마다 지급물품에 변동이 있어 여름·가을엔 보리, 봄·겨울엔 콩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수확,·지방 세금수급 시기와 관련이 있었다. 녹봉은 생활비로 충분한 양이 아니었으나 다행히 부친께서 남겨 둔 전답이 다소 있고 아내도 세간을 본가에서 다소 마련한 덕분에 일곱 식구가 검소하게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경제적 수입을 목적으로 관료가 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로서 입신양명하여 나와 가문을 빛내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탐하였기에 물질이 긍휼한 것을 크게 탓한 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아내와 자식들이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검소한 생활만을 강요받은 것은 가장으로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은 있다.
나는 중앙과 지방 관직을 두루 거치고 65세에 예조판서에서 물러나 고향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겠다고 상께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중추부사로 임명되어
국정을 돕다가 3년 후 명예롭게 퇴직하였으니 생에 대한 회한은 없다.
참고문헌
전통사회와생활문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 가격5,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22.11.11
  • 저작시기202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8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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