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현장을찾아서 = )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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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의현장을찾아서 = )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 (10점, 1매)
(2) 교재 3장을 참조하여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서술해주세요. (10점, 1매)
(3) 교재 10장을 참조하여 일제 식민군항이었던 진해의 ‘부정적 유적’에 대해 서술하고, ‘부정적 유적’ 조사와 답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10점, 1매)
(4) 출처 및 참고 문헌

본문내용

어디에도 없다. 이는 임진왜란의 진실에 대한 망각, 왜곡이며 충무공의 정신과도 배제되는 것이다.
진해의 부정적 유적에 대해 살펴보면 러일 전쟁 시 일제는 진해만을 “승천을 앞둔 교룡이 그림자를 감춘 심언”,“해군력 발전의 요람지”,“제국 융창의 발상지.”로 기념했다. 러일전쟁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일제는 구 진해 시내 한가운데 재황산 공원에 ‘일본해해전기념탑’을 건립했다. 현재 기념탑은 사라졌지만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37·38계단은 남아있다. 웅천 읍성은 일본에 대한 조선 정부의 교린정책의 첫 시험지, 최전선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삼포왜란 시 웅천읍성은 점령되며, 동문도 파괴되었다. 임진 왜란 당시 최초의 왜관이 있었던 남산 자락 위에 일본군이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웅천왜성이다. 웅천왜성은 선박이 많이 정박할 수 있었고, 육로로는 인근 왜성들과 연결되었고, 해로로는 마산, 거제, 서로는 안골포, 가덕도, 부산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웅천 왜성에서는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선인 피랍인 기념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거티브 헤리티지’ 또는 ‘부정적 유적’ 나아가 ‘흑역사’를 탐사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의의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에서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패배, 실패, 상처, 이러한 것들을 기억하면서 교훈을 새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기억에서는 이러한 부정적 유적이 결정적으로 취약하다. 이런 방식으론 우리가 왜 식민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역사의 교훈도 찾을 수 없다. 비극의 기억, 어두운 역사 역시 역사 인류 모두에게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데 중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정적 유적’ 조사와 답사를 통해 당시 시대와 지역을 다방면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4) 출처 및 참고 문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송찬섭·임기환·신춘호·도진순·강정숙·윤상원·박종진·조용섭·박필우·하일식,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박진수(2021),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공동체 구축 방안-노래를 통한 ‘마음’의 교류,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사적지 자로관, 다큐멘터리, [중국]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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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보훈처, 대국민 ‘보훈’ 인식조사 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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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3.02.22
  • 저작시기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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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197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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