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장수왕 이전
(2) 장수왕
1) 천도
2) 남진정책
3) 국호변경
3.
결론
(1) 평가
4.
참고문헌
서론
2.
본론
(1) 장수왕 이전
(2) 장수왕
1) 천도
2) 남진정책
3) 국호변경
3.
결론
(1) 평가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유연과 동시에 대표적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축이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럴 것이다.
3) 국호변경
다음으로는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에 국호를 변경한 사건이 있었다. 평양천도가 발생한 일을 기점으로 하여 고구려의 국호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역시 고려라고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의 시기에 만들어진 중원고구려비를 보게 되면 고려태왕이라고 하는 명문이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보면 고려라고 하는 국호가 갑작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하기는 했지만 국호가 고려라고 굳어진 시기는 공식적으로 장수왕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기록에서도 보면 역시 장수왕이 재위하는 시기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성 있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고구려고 하는 국호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삼국사기가 대표적인 기록에 해당하는데, 현대의 학계에서도 여기 왕건이 만든 고려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서 혼란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이다.
3. 결론
(1) 평가
이번 시간에 본 장수왕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수도를 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당시의 백성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을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일을 단행한다는 것에 불안감도 역시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역시 장수왕은 자신이 왕으로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오롯이 함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본인이 왕이라고 하는 지위에 있었다면 그러한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는 보통 고구려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광개토대왕을 떠올리는 경구가 많다. 이때 장수왕은 그냥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업적이나 결과 등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득을 본 왕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장수왕도 역시 고구려의 국가적인 성장과 발전 등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며 단순히 광개토 대왕의 후대를 이음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장수왕에 대해서 그가 수립한 업적이나 결과 등이 가치 있게 평가가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보면 장수왕은 사실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만을 유일한 업적으로 가지고 있는 왕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업적이 중요하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두 가지의 업적 이외에도 장수왕이 이룬 것들도 역시 충분히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왕에 속하는 광개토대왕, 그다음이 장수왕이기는 하지만 광개토대왕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이 드는 왕이기도 하다.
4. 참고문헌
- 왜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하였나/임기환/내일을 여는 역사/2000
- 장수왕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관계/신동하/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2021
3) 국호변경
다음으로는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에 국호를 변경한 사건이 있었다. 평양천도가 발생한 일을 기점으로 하여 고구려의 국호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역시 고려라고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의 시기에 만들어진 중원고구려비를 보게 되면 고려태왕이라고 하는 명문이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보면 고려라고 하는 국호가 갑작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하기는 했지만 국호가 고려라고 굳어진 시기는 공식적으로 장수왕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기록에서도 보면 역시 장수왕이 재위하는 시기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성 있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고구려고 하는 국호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삼국사기가 대표적인 기록에 해당하는데, 현대의 학계에서도 여기 왕건이 만든 고려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서 혼란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이다.
3. 결론
(1) 평가
이번 시간에 본 장수왕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수도를 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당시의 백성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을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일을 단행한다는 것에 불안감도 역시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역시 장수왕은 자신이 왕으로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오롯이 함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본인이 왕이라고 하는 지위에 있었다면 그러한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는 보통 고구려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광개토대왕을 떠올리는 경구가 많다. 이때 장수왕은 그냥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업적이나 결과 등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득을 본 왕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장수왕도 역시 고구려의 국가적인 성장과 발전 등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며 단순히 광개토 대왕의 후대를 이음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장수왕에 대해서 그가 수립한 업적이나 결과 등이 가치 있게 평가가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보면 장수왕은 사실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만을 유일한 업적으로 가지고 있는 왕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업적이 중요하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두 가지의 업적 이외에도 장수왕이 이룬 것들도 역시 충분히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왕에 속하는 광개토대왕, 그다음이 장수왕이기는 하지만 광개토대왕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이 드는 왕이기도 하다.
4. 참고문헌
- 왜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하였나/임기환/내일을 여는 역사/2000
- 장수왕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관계/신동하/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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