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지역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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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보은지역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보은과 속리산 개관
Ⅱ. 법주사
Ⅲ. 삼년산성(三年山城)
Ⅳ. 화양구곡과 만동묘터

본문내용

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1657년(효종 8)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양보를 이끌어 내었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을받아북벌계획을 담당하였으나 이는 명목상 추진하였을 뿐 실질적인 북벌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하자북벌계획은 곧바로 중지되었다. 그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하였다.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伸寃)되었다.주자학(朱子學)만이 최고의 학문으로 유일시하였으며예학을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송익필,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스승 김집의 뜻에 따라 대동법을 반대하였고 주자에 대한절대적 신임이지나쳐 그와 다른 사상이나 경전의 해석을 경계하였고 주자와 다른 사상은 사문난적으로 내몰았다.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고 스승 김집이 죽고나자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서인들이 추종하였다. 당시 중앙정치는 서인들의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왕권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고그의 아들인 효종 또한서인들의 득세로 왕권이 취약했다. 따라서 왕권보다 강력한 집단 세력을 형성한 서인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이로 인해 서인의 영수로 군림하였던 송시열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을 거치면서 점차높아졌고 관직에 출사않고 지방에 머물면서도 정국을 주도하는영향력을 행사하였다.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고 조선 중기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정치가, 학자로 평가된다.
4-2. 평가
송시열은 학문적으로는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고 조선 후기의 정치, 철학, 사회사상을 확립한 대학자이며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의 정치가이고 당쟁가였다.
그의 제자만도 900명에 이르고 그 중 당상관에 오른 이만도 54명에 이른다. 이황, 이이가 성현으로 칭해지는 ‘이자’(李子)라 한 때 불린 적이 있지만 송시열은 조선 후기 내내 ‘송자’(宋子)라 불리면서 존숭 받았다. 그의 위상과 활약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표현이다.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문도 송시열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위해 효종과 타협한 협의가 짙다. 번번이 효종의 북벌에 제동을 걸었으며 효종이 죽은 후에는 북벌의 의지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력한 북벌주의자는 남인, 특히 윤휴로 대표되는 탁남세력이었다.
자기 당파의 이익이나 붕당의 의리에 치우치고 독선적이며 강직한 성품은 주변과의 불화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서인 한당의 잠곡 김육이 공납의 폐단을 혁파하려고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을 때 송시열은 처음에는 동조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속한 서인 산당의 뜻에 따라 반대를 했고 병자호란 때 정작 자신은 살아남았으면서도 남한산성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왔다고 동문수학한 윤선거를 비난함으로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이던 윤증과 불화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도 제공했다. 또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으로 야기된 두 차례의 예송논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서인과 남인간의 처절한 당파싸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학문은 드높고 삶은 근면 검소하였지만 송시열의 가장 큰 문제는 주자학에 근거한 지나친 친명사대주의다. 그와 서인의 사상인 반청 친명사대주의는 임진, 병자 양 전란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바도 있지만 조선말까지 이어진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예학을 중시하는 서인의 집권은 세상의 변화에 뒤떨어지게 하여 조선을 망하게 한 단초를 제공했다.
자신이 속한 기호학파의 종주인 이이보다 주자가 세상의 이치를 다 밝혔다고 더 높이 받들고 맹신했으며 자신도 중국적이고 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혼례의 예속과 복식, 일상생활에서 중국의 습속을 따랐다. 주자의 학설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다가 망한 명나라의 신종, 의종을 기리는 만동묘와 화양동 암벽곳곳에 남겨진 글발들은 친명사대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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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3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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