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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공통점이 있다.미국 국기에는 별이50개 있고, (구)소련과 이스라엘 국기에는1개,미얀마는14개,그레나다와 베네수엘라는7개,중국은5개,이라크는3개,상투메 프린시페는2개가 있다.일본,우루과이,말라위,방글라데시,대만의 국가에는 태양이 하나씩 그려졌다.브라질 국기에는 천구(天球)가 그려져 있고,오스트레일리아,서사모아,뉴질랜드와 파푸아뉴기의 국기에는 남십자성이 들어 있다.부탄의 국기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용의 여의주가 그려져 있고 캄보디아 국기에는 앙코르와트 천문 관측대가 그려져 있다.인도,대한민국,몽골인민공화국이 국기에는 공통적으로 천체 상징물이 들어있다.사회주의 국가들 중에는 국기에 별을 쓴 경우가 특별히 많다.이슬람 국가들은 초승달을 많이 쓴다.모든 국기 중 거의 절반 정도에 천문학적 상징물이 들어 있는 셈이다.이것은 문화권을 초월하고 사상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매일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 물건을 위로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규칙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이렇게 당연하게 느끼는 현상들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현상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가진 위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현대문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하늘의 변화를 잘 관측하고 예측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천문학이 자연스럽게 발달하면서, 천문학자들의 예측은 한 나라의 큰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예측들은 시간을 지나면서 신비주의 와 미신의 유입으로 점성술과 함께 천문학이 발전하게 된다.
과학으로서의 천문학은 점성술로 태어났다. 인류가 수렵으로 살아갈 때 그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봤다. 사냥꾼, 사냥개, 곰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천체현상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일은 단순히 관심 이상의 절실한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해와 달과 별의 위치며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면 언제 사냥을 나갈지, 언제 씨앗을 쭈릴지, 언제 수확을 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인류에게 일종의 달력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신비주의 미신이 스며든다. 사람들은 하늘의 천체가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점성술의 시작이었다. 여러 단어의 기원에서 점성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데, consider(고려하다)의 어원은 ‘행성과 함께’라는 의미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행성을 반드시 생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점성술의 기원은 프톨레마이오스이다. 그는 2세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일했던 학자인데,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점성술을 체계화 시킨 사람이다. 그 사람의 언행, 키, 성격, 선척적인 장애까지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딱히 구분되지 않았는데, 천문학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학문이고, 점성술은 확고한 근거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로서도 업적이 혁혁하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밝기를 기록했으며, 지구가 구형인 근거를 제시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우주의 모형을 제시했다.
그가 만든 투명한 천구 모형을 두고 중세 사람들은 천구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달, 수성, 금성, 태양 등이 붙어서 돌아가는 구로부터 일곱 개의 천국이 있다고 믿었다. 우주 한 가우데 지구가 있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주축으로 만물이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운 생각이었다. 그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1000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중세는 교회의 틀을 벗어나면 추방과 고문과 죽음으로 처벌을 했던 시대였다. 하늘은 천사와 악마가 사는 곳이며 신의 손이 행성의 천구를 돌리는 곳이었다. 모든 자연현상의 바탕에 물리법칙이 있다는 생각은 그 시대에는 없었다. 그런 생각은 대담하고 혁명적이며 또한 위험했다. 그러나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신이 보시기에 자신이 너무나 비천한 존재이고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절망을 했다. 그는 점성술에 대해 평생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아직까지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일종의 샴쌍둥이 같은 사이로 보인다. 어쨌든 케플러는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지상의 모든 피조물 역시 신의 조화를 드러내야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에게는 정확한 천체 관측자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자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 튀고 브라헤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관측의 귀재였다. 케플러는 제일의 이론가였으니, 운명은 이 두 사람을 맺어주었다. 처음에는 케플러에게 자료를 넘겨주지 않았지만 브라헤가 죽기 전 유언으로 자료를 주라고 했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행성운동을 설명하는 세 법칙을 발견했다. 요지는 천체들은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원은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자 신성의 상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행성들도 마땅히 원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무리 해도 행성들의 실제 궤도와 원궤도를 일치시킬 수 없었다. 신의 조화를 상징하는 완벽한 원과 기하학과 과학적 현실 사이에서 그는 과학을 선택했다.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궤도를 따라서 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덕분으로 인류는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비주의 배제하는 혁명적 도약을 이룬다.
케플러가 일생을 바쳐서 찾아내고자 했던 행성의 움직임과 천상 세계의 조화를 그가 죽고 36년 뒤에 한 천재가 마침내 밝혀낸다. 그의 이름은 뉴턴이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신비주의와 미신을 멀리하지 못했는데, 그의 지적성장은 역설적이게도 이성주의 와 신비주의의 대립과 긴장 덕분이었다. 20살
매일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 물건을 위로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규칙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이렇게 당연하게 느끼는 현상들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현상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가진 위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현대문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하늘의 변화를 잘 관측하고 예측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천문학이 자연스럽게 발달하면서, 천문학자들의 예측은 한 나라의 큰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예측들은 시간을 지나면서 신비주의 와 미신의 유입으로 점성술과 함께 천문학이 발전하게 된다.
과학으로서의 천문학은 점성술로 태어났다. 인류가 수렵으로 살아갈 때 그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봤다. 사냥꾼, 사냥개, 곰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천체현상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일은 단순히 관심 이상의 절실한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해와 달과 별의 위치며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면 언제 사냥을 나갈지, 언제 씨앗을 쭈릴지, 언제 수확을 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인류에게 일종의 달력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신비주의 미신이 스며든다. 사람들은 하늘의 천체가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점성술의 시작이었다. 여러 단어의 기원에서 점성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데, consider(고려하다)의 어원은 ‘행성과 함께’라는 의미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행성을 반드시 생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점성술의 기원은 프톨레마이오스이다. 그는 2세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일했던 학자인데,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점성술을 체계화 시킨 사람이다. 그 사람의 언행, 키, 성격, 선척적인 장애까지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딱히 구분되지 않았는데, 천문학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학문이고, 점성술은 확고한 근거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로서도 업적이 혁혁하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밝기를 기록했으며, 지구가 구형인 근거를 제시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우주의 모형을 제시했다.
그가 만든 투명한 천구 모형을 두고 중세 사람들은 천구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달, 수성, 금성, 태양 등이 붙어서 돌아가는 구로부터 일곱 개의 천국이 있다고 믿었다. 우주 한 가우데 지구가 있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주축으로 만물이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운 생각이었다. 그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1000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중세는 교회의 틀을 벗어나면 추방과 고문과 죽음으로 처벌을 했던 시대였다. 하늘은 천사와 악마가 사는 곳이며 신의 손이 행성의 천구를 돌리는 곳이었다. 모든 자연현상의 바탕에 물리법칙이 있다는 생각은 그 시대에는 없었다. 그런 생각은 대담하고 혁명적이며 또한 위험했다. 그러나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신이 보시기에 자신이 너무나 비천한 존재이고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절망을 했다. 그는 점성술에 대해 평생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아직까지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일종의 샴쌍둥이 같은 사이로 보인다. 어쨌든 케플러는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지상의 모든 피조물 역시 신의 조화를 드러내야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에게는 정확한 천체 관측자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자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 튀고 브라헤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관측의 귀재였다. 케플러는 제일의 이론가였으니, 운명은 이 두 사람을 맺어주었다. 처음에는 케플러에게 자료를 넘겨주지 않았지만 브라헤가 죽기 전 유언으로 자료를 주라고 했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행성운동을 설명하는 세 법칙을 발견했다. 요지는 천체들은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원은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자 신성의 상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행성들도 마땅히 원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무리 해도 행성들의 실제 궤도와 원궤도를 일치시킬 수 없었다. 신의 조화를 상징하는 완벽한 원과 기하학과 과학적 현실 사이에서 그는 과학을 선택했다.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궤도를 따라서 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덕분으로 인류는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비주의 배제하는 혁명적 도약을 이룬다.
케플러가 일생을 바쳐서 찾아내고자 했던 행성의 움직임과 천상 세계의 조화를 그가 죽고 36년 뒤에 한 천재가 마침내 밝혀낸다. 그의 이름은 뉴턴이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신비주의와 미신을 멀리하지 못했는데, 그의 지적성장은 역설적이게도 이성주의 와 신비주의의 대립과 긴장 덕분이었다. 2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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