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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다는 일종의 지동설을 제창하였으나, 다른 학자들의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⑦ 아낙사고라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이오니아 클라조메네 출생이고 아테네에서 활약하였으며 거기에서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은 것이 후에 소송의 와중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테네에 철학을 이식하여 엘레아학파의 출현에 의한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생성, 소멸이란 것을 부정하고, 만물은 처음부터 있었고, 그 혼합과 분리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만물의 종자에서는 만물 속에 만물이 포함되었고, 다만 지성만이 순수하고 가장 정미한 것이며, 태고의 종자는 혼돈인 채 있었는데, 이 지성의 작용으로 회전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대되어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온다고 하였다. 또한 지성은 만물에 질서를 주어 모두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른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앞머리가 벗겨지고 녹색 옷을 걸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의문을 갖고 끊임 없이 분석해 가는 것이 참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설파하고 있다.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군인같은 인물은 소크라테스에게 감명받았던 알키비아데스이고,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 강연 중 딴 곳을 보고 있다.>
⑧ 알렉산더 대왕과 소크라테스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다.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리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아테네 출생이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했다.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혼’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되는 것이다.
⑨ 조로아스터, 라파엘로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으로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가 비교적 유력한 시기로 추정된다.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 중 검은 모자 쓴 사람이 <아테네 학당>의 이 대작을 불과 2년여에 완성한 화가 라파엘로이다. 라파엘로는 \"내가 과연 여기에 끼어도 되나?\"라는 모습으로빼꼼히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을 마주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상자와 눈이 마주칠 수 있는 포즈이다. 그의 앞에 흰 모자를 쓴 사람은 그의 후배격인 화가인 소도마.
* 성체논의와 아테네학당이 있는 서명의 방
나) 성체논의
성체논의는 1509년 초엽에 시작한 첫 번째 벽화이며 신학을 나타낸 그림이다. 디스푸타는 본래 주된 기독교 미술 주제 중의 하나이며 원뜻은 논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성찬(성체), 무구수태, 삼위일체 등 중요한 신학상의 문제를 논하는 성직자, 성인, 교부 등의 집회도를 일
⑦ 아낙사고라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이오니아 클라조메네 출생이고 아테네에서 활약하였으며 거기에서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은 것이 후에 소송의 와중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테네에 철학을 이식하여 엘레아학파의 출현에 의한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생성, 소멸이란 것을 부정하고, 만물은 처음부터 있었고, 그 혼합과 분리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만물의 종자에서는 만물 속에 만물이 포함되었고, 다만 지성만이 순수하고 가장 정미한 것이며, 태고의 종자는 혼돈인 채 있었는데, 이 지성의 작용으로 회전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대되어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온다고 하였다. 또한 지성은 만물에 질서를 주어 모두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른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앞머리가 벗겨지고 녹색 옷을 걸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의문을 갖고 끊임 없이 분석해 가는 것이 참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설파하고 있다.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군인같은 인물은 소크라테스에게 감명받았던 알키비아데스이고,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 강연 중 딴 곳을 보고 있다.>
⑧ 알렉산더 대왕과 소크라테스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다.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리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아테네 출생이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했다.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혼’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되는 것이다.
⑨ 조로아스터, 라파엘로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으로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가 비교적 유력한 시기로 추정된다.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 중 검은 모자 쓴 사람이 <아테네 학당>의 이 대작을 불과 2년여에 완성한 화가 라파엘로이다. 라파엘로는 \"내가 과연 여기에 끼어도 되나?\"라는 모습으로빼꼼히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을 마주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상자와 눈이 마주칠 수 있는 포즈이다. 그의 앞에 흰 모자를 쓴 사람은 그의 후배격인 화가인 소도마.
* 성체논의와 아테네학당이 있는 서명의 방
나) 성체논의
성체논의는 1509년 초엽에 시작한 첫 번째 벽화이며 신학을 나타낸 그림이다. 디스푸타는 본래 주된 기독교 미술 주제 중의 하나이며 원뜻은 논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성찬(성체), 무구수태, 삼위일체 등 중요한 신학상의 문제를 논하는 성직자, 성인, 교부 등의 집회도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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