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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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실크로드의 세계사적 의의

Ⅱ. 실크로드의 기원

Ⅲ. 실크로드의 변천

본문내용

로부터 도망 나와 大宛(우즈벡내)을 거쳐 阿姆河북쪽의 大夏(아프가니스탄의 북쪽)에서 大月氏를 만나게 되어 그곳에서 1년을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 의해 붙잡혔다가 구류된지 1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에 西安을 떠난지 13년만에 천신만고 끝에 西安으로 돌아왔다. 大月氏는 이미 좋은 토지를 찾아 정착민족이 되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漢은 그의 여행을 통해 서역의 각 나라에 대해 이해하고 연결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2. 法顯 : 399년 長安을 출발하여 난저우를 거쳐 돈황에 도착하였다. 돈황에서 여행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은 후 사막을 통과하여 17일 만에 산샨(樓蘭)왕국에 도착하였다. 산샨 왕국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인도의 불교를 배워서 인도의 승려규율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1개월 후에 산샨을 출발하여 高昌을 거쳐 15일 후에 엔치(焉耆)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4000여명의 소승불교의 승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焉耆에서 2개월을 머문 후 다시 吐魯番으로 돌아와 여행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몇 사람과 함께 타클라마칸사막을 통과하여 35일 만에 和田에 도착하였다. 그는 기술하기를 和田은 번영된 왕국이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수천 명의 승려들이 있었고 일부 승려들은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문 후 쿤륜산맥을 넘어 인도에 도착하였다. 414년에 海路로 중국에 돌아왔다.
 3. 顯奬(603-664) : 현장이 쓴 《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으며, 16세기에 출판된 《西游記》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현장은 629년 長安을 출발하여 먼저 돈황에 도착하여 혼자서 800리 이상 되는 사막을 통과하여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의 高昌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高昌에 남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여행할 것을 굽히지 않자 高昌왕은 그에게 동행인과 양식을 주고 서역의 왕국에 소개신을 써주었다. 그는 투루판을 떠나 焉耆,쿠처,拜城에 도달하여 북쪽으로 가서 천산을 넘어 이씩쿨호(키르그즈스탄)지역을 지나 楚河를 따라 탈라스를 지나 타쉬켄트를 경유해서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였다. 다시 서행하여 카라코람사막을 통과하여 후어라사지역에서 남서쪽으로 전환하여 大夏의 도읍인 헤라트를 지나 阿姆河의 상류인 昆都士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高昌왕의 서신을 보여주었을 때 高昌國과 친척관계인 大夏의 왕은 매우 기뻐하고 환대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북부고원을 넘어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몇 년을 머무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西安으로 돌라왔다.
 4. 慧超(700?-780?) : 혜초는 700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20세가 못되어 중국의 長安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이에 만족치 않고 불교의 본고장인 天竺國(인도)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광저우로가서 배를 타고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얼머동안 머무른 뒤, 인도의 서북부에서 大夏(이미 아랍인이 통치함)의 북부를 통해 타쉬코르칸을 넘어 카쉬카르를 통과하고 쿠쳐, 엔치, 高昌을 거쳐 西安으로 돌아와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는 인도의 중부에서부터 焉耆에 이르는 여행을 기행문으로 《往五天竺國傳》을 기록하였는데, 이 책은 자신이 방문한 곳의 불교상황, 국가의 통치관계, 풍속습관 및 경제생활을 기록하여서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우연하게도 1908년 돈황에서 프랑스의 동약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5. 高仙芝 : 당나라 때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튼 영웅으로 불려지고 있다. 당은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해 4월 고구려유민들을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선지의 부친 고사계(高舍溪)는 타고난 무인이라 안서군의 四鎭장교로 진급되었다. 이런 무가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워서 20세 정도에 부친과 동등한 계급에 올랐으며, 서기 741년 安西副都護,四鎭知兵馬使에 올랐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악수, 카쉬카르, 타쉬코르간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티벳족의 선조)의 군사기지인 蓮雲堡(치트랄)를 격파하고 험준한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小勃律국(지금의 크시미르지역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북부지역에 있던 나라)을 정벌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통로인 교량을 파괴하고 돌아온 후부터이다. 이후 그는 安西四鎭節道使에 임명되었다. 그때 고선지는 석국(石國)(우즈벡의 타쉬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투르크족의 나라) 왕이 당나라에 무례하게 굴었다 하여 원병을 주장했을 때 당의 玄宗은 이에 동의하여, 고선지는 750년 석국에 진공하여 석국을 물리치고 석국왕을 포로로 잡아 長安으로 송치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각나라에 불만을 가져오게 하고 석국의 왕자는 大食國(아랍 이슬람 압바스 왕조 또는 사라센제국이라 부름)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751년 大食은 중국과 사이가 나쁜 토번과 연합하여 탈라스(현재 카작스탄의 江布爾)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 소식을 듣고 고선지는 6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탈라스에서 대치한지 5일 후에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룩이 배후에서 고선지의 군대를 공격하여 협 공을 당한 고선지의 군대는 패배하고 만다. 고선지는 귀국한 후 좌천되나, 755년 안록산의 반란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현종은 그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했다. 먼저 출전하여 패전한 봉상청과 교대하면서 봉상청으로부터 적의 상황을 듣고 요새인 동관까지 작전상 후퇴한다. 이같은 수비책은 현종이 서촉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고선지는 후퇴하면서 錢絹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태원창을 열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화근이 되었다. 그의 부관이고 小勃律 원정시 監軍이었던 邊令誠은 금품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현종에게 고선지와 봉상청이 전투를 거부하고 도망했다고 상소했다. 이 글을 받아본 현종은 당사자의 변명도 듣지 않은 채 참형을 결정하였다. 탈라스 전투에 참전한 당나라 군사의 상당수가 종이 제조기술자 이어서, 아랍은 이들을 생포해가 사마르칸트에 종이 제조공장을 세웠다. 이로써 종이 제조기술이 서방에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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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03
  • 저작시기200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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