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목차
1.여성주의 저널리즘에 관하여
2.공동 善을 위한 페미니스트 저널리즘의 추구
3.여성주의 저널리즘의 전망과 과제
....
2.공동 善을 위한 페미니스트 저널리즘의 추구
3.여성주의 저널리즘의 전망과 과제
....
본문내용
는 사실상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여성운동뉴스를 신문뉴스아이템으로 만드는 공로자가 되었다. 물론 그녀는 베테랑기자였고 상사한테 자신이 취재한 뉴스가 보도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고 하락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남녀동등법안 보도 이후에도 전국여성기구(NOW)나 여성정치연맹(WPC) 관련뉴스를 신문지상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래 경제기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본래 출입처이자 담당분야인 경제기사를 취재하면서 자원해서 가외로 여성뉴스를 취재하게 됐다. 그녀가 취재하는 경제관련부처는 매우 관료적이고 제도적으로 취재관행이 정착되어있으나 페미니스트그룹들의 활동스케쥴은 신문사의 취재 스케쥴과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간신문 기자들은 오전에 취재하고 초저녁에 기사를 쓰기위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가판마감에 대려면 기사를 일찍 써야하고 일요판 신문기사는 하루 전에 넘겨야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초창기 여성운동단체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갖고 있고 퇴근 이후의 저녁시간을 운동에 쏟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스케쥴은 기자들의 스케쥴과 정반대였기 때문에 이들 기자들은 가외로 일을 하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뉴욕타임스 고위직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그레이스 리히텐스타인은 1975년 강간법안이 상정되어 있던 콜로라도주 법안논란을 시발로 전국적으로 각주의 강간법안을 살펴보는 대형기사를 기획해서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로 심층보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자들조차도 강간법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던 시기였고 이 기사는 미 전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여성들만이 강간법안을 주제로 기사화할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남성들은 단지 벌금이 얼마라던가 처벌이 어떤다던가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을 뿐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를 다룬 법안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런 여기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뉴욕타임스지 여성면은 1970년대 새로운 스타일의 저널리즘을 확립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편이다. 뉴욕타임스지의 여기자들은 뉴욕타임스의 여성페이지가 미국에서 최고로 페미니스트시각이 분명한 신문이라고 자평을 한다. 여성페이지 편집자인 조앤 휘트만은 '여성을 위한 뉴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관한 뉴스를 보도한다'고 정의 내린다. 또한 여성에 관한 뉴스는 당연히 여성운동에 관한 뉴스를 포함하며 특히 여성의 삶의 변화와 여성운동의 효과 등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휘트맨은 여성면에서 여성운동뉴스를 다루는 것이 다른 종합지면에서 다루는 것보다 더 잘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여성면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한다.
휘트맨은 매일 아침 편집국장과 각 부서장들이 오여서 하는 부장단회의 참석을 해서 자신들의 취재분야에서 생긴 뉴스들을 보고하고 그리고 1면에 들어갈 뉴스들을 제공하고 회의를 거쳐 할당을 받게 된다. 휘트맨은 여성뉴스가 여성면에서 다루어질 경우 그들은 워터게이트 보도와 뉴스가치를 경쟁할 필요가 없이 보장된다는 점을 이점으로 든다. 따라서 만약 페미니스트뉴스가 여성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신문에 종합지면에서는 더욱 다루어지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뉴스경쟁이 심한 다른 지면에는 지면이 부족한 실정으로 1면에 짧게 나가는 것보다 여성면에 충실하게 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기자들도 있는 편이다.
휘트맨에 따르면 여성운동관련뉴스는 다른 뉴스와 달리 분초를 다루는 특종아이템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립지면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휘트맨의 어림짐작에 의하면 일년에 10-12번 정도 여성뉴스가 전국적인 종합뉴스아이템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고 이 경우 종합 1면에서 시작하여 여성면으로 이어지게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면에 여성뉴스를 소화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여성운동의 봉화 불을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1965년 전국여성기구 결성뉴스는 뉴욕타임스 여성면에 칠면조요리법 기사와 디자이너 피에르 헨리가 뉴욕 5번가 식스백화점으로 돌아왔다는 뉴스와 함께 보도되었고 전국여성기구 초대 회장인 베티프리단의 인터뷰기사가 함께 실렸는데 인터뷰는 최소한 몇일전에 행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뉴욕타임스는 전국여성기국 결성뉴스를 소프트뉴스로 취급한 것이다.
또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딸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가 일주일간 공석이 되게된 앵커우먼 바바라 월터스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기자회견에 배당된 기자는 생활부 여성담당기자였으나 그녀가 기자회견장에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하드뉴스로 변해 1면 정치기사로 재배치되어 실렸다. 여성관련뉴스는 사실이 중시되면 하드뉴스로 또 그 사실이 이슈로 전환되면 소프트뉴스로 간주되어 여성면으로 실리게 되는 운명이다.
또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유엔여성의 해 기념 보도사건은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국제부 소속 유엔담당기자가 취재해서 종합 국제뉴스면에서 다루어지던 기사가 나중에는 생활부 여성담당기자인 쥬디 클렘스루드에 의해 여성면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여성관련 뉴스는 특별지면으로 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성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 통합되듯이 여성관련 뉴스도 세상의 모든 부문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이런 주장은 여성면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면서 여성운동 뉴스를 다루던 여성페이지 담당자들의 독립성과 권한을 축소시키는 위험이 공존한다. 최근 생활부가 없어지고 그나마 여성들이 부장으로 올라가던 생활부장이 없어진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여성호칭 Ms. 경우
뉴욕타임스는 제랄딘 페라로가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나왔던 선거에서 페라로에게 미즈 페라로를 쓰지 못하는 것이 자기 신문의 방침이라며 미세스 자카로를 쓸 것을 요구했다. 페라로여사는 그렇다면 차라리 미세스 페라로로 써달라고 요구해 계속 미세스 페라로로 나왔다. 미즈지는 뒤에 뉴욕타임스지가 미즈사용 불허방침을 바꾸고 미즈를 사용하는 결정을 내리자 편집국장 앞으로 장미꽃다발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타임지를 비롯해 워싱턴시 낙태시위 때 취재차 갔던 여기자들이 시위에 참가하자 징계명령을 내리고 출입처를 바꾸는 결정을 내렸었다.
원래 경제기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본래 출입처이자 담당분야인 경제기사를 취재하면서 자원해서 가외로 여성뉴스를 취재하게 됐다. 그녀가 취재하는 경제관련부처는 매우 관료적이고 제도적으로 취재관행이 정착되어있으나 페미니스트그룹들의 활동스케쥴은 신문사의 취재 스케쥴과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간신문 기자들은 오전에 취재하고 초저녁에 기사를 쓰기위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가판마감에 대려면 기사를 일찍 써야하고 일요판 신문기사는 하루 전에 넘겨야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초창기 여성운동단체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갖고 있고 퇴근 이후의 저녁시간을 운동에 쏟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스케쥴은 기자들의 스케쥴과 정반대였기 때문에 이들 기자들은 가외로 일을 하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뉴욕타임스 고위직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그레이스 리히텐스타인은 1975년 강간법안이 상정되어 있던 콜로라도주 법안논란을 시발로 전국적으로 각주의 강간법안을 살펴보는 대형기사를 기획해서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로 심층보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자들조차도 강간법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던 시기였고 이 기사는 미 전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여성들만이 강간법안을 주제로 기사화할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남성들은 단지 벌금이 얼마라던가 처벌이 어떤다던가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을 뿐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를 다룬 법안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런 여기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뉴욕타임스지 여성면은 1970년대 새로운 스타일의 저널리즘을 확립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편이다. 뉴욕타임스지의 여기자들은 뉴욕타임스의 여성페이지가 미국에서 최고로 페미니스트시각이 분명한 신문이라고 자평을 한다. 여성페이지 편집자인 조앤 휘트만은 '여성을 위한 뉴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관한 뉴스를 보도한다'고 정의 내린다. 또한 여성에 관한 뉴스는 당연히 여성운동에 관한 뉴스를 포함하며 특히 여성의 삶의 변화와 여성운동의 효과 등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휘트맨은 여성면에서 여성운동뉴스를 다루는 것이 다른 종합지면에서 다루는 것보다 더 잘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여성면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한다.
휘트맨은 매일 아침 편집국장과 각 부서장들이 오여서 하는 부장단회의 참석을 해서 자신들의 취재분야에서 생긴 뉴스들을 보고하고 그리고 1면에 들어갈 뉴스들을 제공하고 회의를 거쳐 할당을 받게 된다. 휘트맨은 여성뉴스가 여성면에서 다루어질 경우 그들은 워터게이트 보도와 뉴스가치를 경쟁할 필요가 없이 보장된다는 점을 이점으로 든다. 따라서 만약 페미니스트뉴스가 여성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신문에 종합지면에서는 더욱 다루어지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뉴스경쟁이 심한 다른 지면에는 지면이 부족한 실정으로 1면에 짧게 나가는 것보다 여성면에 충실하게 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기자들도 있는 편이다.
휘트맨에 따르면 여성운동관련뉴스는 다른 뉴스와 달리 분초를 다루는 특종아이템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립지면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휘트맨의 어림짐작에 의하면 일년에 10-12번 정도 여성뉴스가 전국적인 종합뉴스아이템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고 이 경우 종합 1면에서 시작하여 여성면으로 이어지게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면에 여성뉴스를 소화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여성운동의 봉화 불을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1965년 전국여성기구 결성뉴스는 뉴욕타임스 여성면에 칠면조요리법 기사와 디자이너 피에르 헨리가 뉴욕 5번가 식스백화점으로 돌아왔다는 뉴스와 함께 보도되었고 전국여성기구 초대 회장인 베티프리단의 인터뷰기사가 함께 실렸는데 인터뷰는 최소한 몇일전에 행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뉴욕타임스는 전국여성기국 결성뉴스를 소프트뉴스로 취급한 것이다.
또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딸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가 일주일간 공석이 되게된 앵커우먼 바바라 월터스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기자회견에 배당된 기자는 생활부 여성담당기자였으나 그녀가 기자회견장에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하드뉴스로 변해 1면 정치기사로 재배치되어 실렸다. 여성관련뉴스는 사실이 중시되면 하드뉴스로 또 그 사실이 이슈로 전환되면 소프트뉴스로 간주되어 여성면으로 실리게 되는 운명이다.
또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유엔여성의 해 기념 보도사건은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국제부 소속 유엔담당기자가 취재해서 종합 국제뉴스면에서 다루어지던 기사가 나중에는 생활부 여성담당기자인 쥬디 클렘스루드에 의해 여성면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여성관련 뉴스는 특별지면으로 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성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 통합되듯이 여성관련 뉴스도 세상의 모든 부문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이런 주장은 여성면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면서 여성운동 뉴스를 다루던 여성페이지 담당자들의 독립성과 권한을 축소시키는 위험이 공존한다. 최근 생활부가 없어지고 그나마 여성들이 부장으로 올라가던 생활부장이 없어진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여성호칭 Ms. 경우
뉴욕타임스는 제랄딘 페라로가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나왔던 선거에서 페라로에게 미즈 페라로를 쓰지 못하는 것이 자기 신문의 방침이라며 미세스 자카로를 쓸 것을 요구했다. 페라로여사는 그렇다면 차라리 미세스 페라로로 써달라고 요구해 계속 미세스 페라로로 나왔다. 미즈지는 뒤에 뉴욕타임스지가 미즈사용 불허방침을 바꾸고 미즈를 사용하는 결정을 내리자 편집국장 앞으로 장미꽃다발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타임지를 비롯해 워싱턴시 낙태시위 때 취재차 갔던 여기자들이 시위에 참가하자 징계명령을 내리고 출입처를 바꾸는 결정을 내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