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신화 - 은진 송씨 가문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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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 목 :은진송씨
□ 총 페이지수 : 5
□ 목 차:은진 송씨 가문 설화 중심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영정 - 대전시 동구 마산동 관동묘려 內)
- 아명(兒名)은 성뢰(聖賚), 자(字)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 시호는 문정(文貞).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덕은(德恩)·시진(市津) 두 현의 합명인데, 덕은현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을 신라 경덕왕이 덕은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덕은으로 개칭하였다.

본문내용

다.
군수(郡守) 이 창(李 昌)의 아들 동춘당(同春堂) 준길(浚吉)은 우암(尤庵)과 같은 학통의 성리학자로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율곡(栗谷) 이 이(李 珥)의 학설을 따랐다. 문장과 필법에도 능했던 그는 『동춘당집』과『어록선』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학문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학자로서 대성하여 우암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목매어 순절한 시영(時榮:방조의 아들)과 학문이 뛰어나 우암·동춘당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어졌던 규렴(奎濂:이조 판서 국전의 셋째아들)이 유명했으며, 시열의 손자 주석(疇錫)은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저술하여 정조 때 이조 판서를 지낸 덕상(德相:무원의 아들)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외 영조 때 묘향산에서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능상(能相), 인상(寅相)의 아들로 이조 판서와 우찬성(右贊成)을 지내고『성담집』을 저술했던 환기(煥箕), 환명(煥明)의 아들로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지지했던 치규(穉圭), 철종 때 승지(承旨)를 거쳐 이조 참의를 역임했던 달수(達洙:흥학의 아들)와, 고종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근수(近洙)의 형제가 가통을 이었고, 병선(秉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여, 1926년 순종의 죽음을 조상하러 오는 일본 총독 사이또오를 암살하려 했던 학선(學先: 성근의 아들)과 함께 명문 은진 송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진 송씨는 남한에 총 44,939 가구, 187,3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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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2.04.04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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