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요약
2. 감상
3. 윤동주에 대해
4. 윤동주 연보
2. 감상
3. 윤동주에 대해
4. 윤동주 연보
본문내용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
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 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
1955년 2월 서거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대촌익부(大村益夫)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회와 언론에 소개됨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함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됨.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음. 현재 유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 들은 3백을 상회함.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
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 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
1955년 2월 서거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대촌익부(大村益夫)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회와 언론에 소개됨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함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됨.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음. 현재 유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 들은 3백을 상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