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가우디 (Antoni Gaudi )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정(聖家庭)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정(聖家庭)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본문내용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을 만들 것을 의뢰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하게 했다. 또한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꿰뚫어보고, 궁정의 인문주의자들과 토론한 철학적 주제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일을 라파엘로의 손에 맡겼다. 이 주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로마 교회의 권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진리의 승리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알레고리이며, 플라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가 이무렵에 진행한 일들은 다른 건물들을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 초상화, 제단화(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엘리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사람으로 라파엘로를 선정했고,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웅장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비비에나 등을 비롯한 문필가들도 여럿 있었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상을 보존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명했다.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설계도를 창조하고 있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1516년 이후에 착공되었는데,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건축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는 미래를 예견했다.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 Transfiguration〉 (1517 의뢰)에서 그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새로운 세계를 예견한 듯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그림의 구도는 이미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라파엘로는 37번째 맞는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교황청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거행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이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진리의 승리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알레고리이며, 플라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가 이무렵에 진행한 일들은 다른 건물들을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 초상화, 제단화(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엘리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사람으로 라파엘로를 선정했고,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웅장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비비에나 등을 비롯한 문필가들도 여럿 있었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상을 보존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명했다.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설계도를 창조하고 있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1516년 이후에 착공되었는데,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건축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는 미래를 예견했다.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 Transfiguration〉 (1517 의뢰)에서 그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새로운 세계를 예견한 듯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그림의 구도는 이미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라파엘로는 37번째 맞는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교황청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거행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이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