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및 잠실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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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강남지역의 서울시 편입
광복이후부터 1963년 1월 1일에 서울시에 편입될 때까지의 강남지역은 고요한 농촌지대였다. 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서울시의 행정구역은 동서남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1962년 말 현재 268.353㎢였던 서울시의 면적이 일약 605㎢를 넘게 되었으니 2배를 훨씬 넘은 엄청난 구역확장이었다.

제3한강교 착공
1966년 1월 초순에 발표된 서울시 남서울계획 구상이라는 것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제3한강교 가설공사에 앞서서 그와 같은 교량공사가 왜 필요한지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치영 시장이 1966년 초에 제3한강교 건설에 착수한 데는 남서울개발이라는 수요보다는 오히려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는 오늘날 강남 개발의 계기가 되었으며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공사의 착공은 4개구간으로 나뉘어졌다. 제1차 착공은 서울~수원~오산간이었고, 제2차는 오산~천안~대전간이었고, 대구~경주~부산간 공사의 기공식은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68년 9월 11일에야 거행되었다. 대전~대구 구간은 해를 넘겨 69년 1월 4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가져다 준 영향은 자동차시대의 개막, 그리고 전 국토 1일 생활권시대를 열어 놓았다는 점, 전 국토에 걸친 엄청난 지역개발 효과와 경제개발 촉진, 엄청난 양의 사람과 물자의 지역 간 이동, 대도시 집중의 가속화, 국민 의식수준의 엄청난 향상과 평준화이며, 수도 서울과 서울시민에게 가져다 준 효과는 서울 시민 전체의 강남지향(江南志向)이었고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에 대한 깊은 인식이었다.

제3한강교 준공 및 영동 구획정리사업
영동 구획정리사업의 경우는 대통령이 특별히 서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마지막 확장 때는 반포에서 제3한강교 남단에 이르는 강변도로(당시 강변 5로) 용지확보를 위한 확장이었는데 이는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마구 확장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내용

람의 말 한마디와 몇몇 정치인들의 농간에 의해 이렇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우습다. 한편으론 그렇게 과감한 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한 절대적인 권력자와 그를 따르는 수없이 많은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에 지금과 같은 정치상황이었더라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수의 의견이 수렴되는 과정을 거치고 계획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검토를 통한 결과물은 지금 현재가 더 좋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그 많은 문제들을 그렇게 일괄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그 당시의 상황을 칭송하거나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그러한 절대 권력의 힘을 뒤에 업고 국민을 우롱하고 농락하며 부당한 방법으로 자산을 늘리는 여러 공무원과 청치인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개발은 문제의 발생과 필요성의 부각을 통해 개발을 덧붙이기 식으로 한 권력자의 힘으로 진행해 왔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와 필요성에 끌려 다니지 않고, 한 권력자의 힘보다는 철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한 예측과 여러 타당성에 의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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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페이지
  • 등록일2002.06.20
  • 저작시기2002.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6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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