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의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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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애처로울 만큼 자기 희생적인 여성의 본보기이다. 첩으로 맞아들인 연영(蓮英)에 미친 왕룽은 그 첩에게 주기 위하여 그에게 큰 재산을 안겨 준 이 조강지처 오란으로부터 그녀 몫으로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진주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녀가 흘리는 두 줄기의 눈물……맏아들 왕따(王大)가 연영과 사랑하는 사이임을 발견하고 노한 왕룽은 그를 집에서 내쫓아 남쪽으로 유학을 시킨다. 그러나 오란이 중병으로 누웠을 때 왕룽은 그를 소환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오란이 안심하고 눈을 감게 해 준다. 성내의 집을 아들에게 맡기고 옛 토막집으로 돌아간 왕룽은 그의 천치딸을 정성껏 돌보아온 18세의 하녀 이화(梨花)에게 자신도 시중들게 하면서 방안 한구석에 놓아둔 향목관을 바라보며 만년을 보내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두 큰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땅을 파는 날에는 마지막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대지》가 나올 무렵 세계의 열강은 중국에서 이권을 다투고 국내에서는 농민들이 압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대지를 믿고 사는 농민의 모습은 인간답게 살아 나가려는 사람들의 운명의 드라마로서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즈음 여사는 창작과 병행하여 향후 만 4년이 걸린 방대한 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지》의 영역에 부심하고 있었다. 《All Men are Brothers(,사해동포)》라는 제목을 붙인 그 번역은 썩 잘된 것이며 여사의 큰 업적의 하나로 치고 있다.
1831년에 일본 침략군은 만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양쯔강에 일찍이 없었던 홍수가 난 이해에 여사의 아버지는 피서지에서 객사했다. 이에 앞서 여사의 아버지는 이해에 존 데이 사에 의해 출판된 《대지》를 훑어보고는, 딸에게 언제 그런 것을 쓸 시간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뿐 그것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는 중국 유학자들처럼 소설이란 무가치한 것이며 점잖은 사람이 읽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미국에서 그해에만 200만 부 가까이 팔렸으며,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전반기의 세계 최고 베스트 셀러로 기록되었다.
여사는 《대지》가 그렇게 굉장한 성공을 거둔 주요한 원인은 그것이 풍기는 이국정취 탓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물들 때문이라고 했다. 여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상 이 소설에서 중국 특유의 것을 싫어한 독자가 많았다. 그들이 좋아한 것은 그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다. 그 인물들은 자신과 그들의 주변 사람들과 흡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작품의 스토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재미있는 소설처럼 스토리가 웬만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특유의 것--이를테면 비참한 기근이며, 비적 이야기며, 여성을 다루는 중국인의 대담성에 대해서 항의하는 독자들도 많이 있었다. 나는 독자들로부터 불쾌감과 노여움과 항의의 소리를 담은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장로교 선교사위원들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는 중국인의 생활을 여사가 본대로 그린 것을 찬양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왜 하필이면 여사가 중국인의 결혼과 섹스에 대한 풍습을 드러내어 죄짓는 생활, 고난의 생활 따위의 자연주의적 묘사를 했는가 하는 항의였다. "왜 당신의 재능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하고 따지는 것들이었다. 물론 여사는 그런 비평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왕룽 같은 농민이 예수를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장로교 선교사와의 불화는 여사가 1932년에 행한 한 연설과 잡지기사가 불씨가 되어 마침내 여사는 지니고 있던 선교사의 자격마저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사는 <모든 종교는 다 좋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여사는 어느날 하녀가 양말을 깁다 말고 우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어떤 선교사가 그녀에게 "너의 양친은 예수를 안 믿었으므로 지금 지옥 불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녀 자신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승에서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서러워서 운다는 것이었다. 여사는 하녀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여사 자신의 양친이 아닌 다른 선교사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 하녀와 같이 울면서 그럴 것 없이 우리도 기독교를 믿지 말고 다 같이 지옥에 가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 에피소드 역시 여사의 전기에 여사 자신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 여사의 마지막 대작이 방대한 《성서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여사는 기독교적 사랑을 믿었으나 편협한 기독교 선교사의 노선엔 찬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지》를 쓴 여사의 간결한 문체에 대해서는 성경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사는 그것은 성경체가 아니라 중국어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의 이야기를 쓰는 만큼 여사의 문체가 중국어 스타일의 영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여사가 《대지》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지》는 그 해에 미국내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8년 받은 노벨 문삭상은 그녀의 <중국 농민생활의 풍부하고 진실로 서사시적인 묘사> 《대지》와 그 속편인 《아들들(Sons)》(1932년)과 《분열된 일가》(1935), 즉 《대지》 3부작과 《어머니》(1934) 그리고 선교사인 양친을 그린 《싸우는 천사》(1936)와 《어머니의 초상》(1936)의 두 훌륭한 전기작품 등 그 때까지 출판된 여사의 거의 전 작품에 대해서 주어진 것이다.
여사가 귀국 후에 재혼한 리처드 윌시 씨와의 사이엔 소생이 없었으며, 전남편 벅 씨와의 사이에 난 정신박약의 딸 캐롤 이외에 여사에게는 친자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여사는 항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1969년 7월 여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동안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나에겐 양자녀가 아홉이나 있고, 손자손녀가 열둘이나 된다. 그들은 모두 내 집 가까이 살고, 또 내 집에는 지금 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소녀 넷이 나와 같이 살고 있다. 내 집은 부산하고, 내 생활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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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6.29
  • 저작시기2002.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7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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