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탈현대시대의 동도동기론적 해석학
제2장: 한글의 구성원리와 세계관-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
1) 한국전통문화의 구성원리와 한글
2)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에서 본 한글
제 3장: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다석과 현재의 한글로 신학하기
4장: 한글로 신학하기의 영성- 동도동기론적 기독교 이해
제2장: 한글의 구성원리와 세계관-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
1) 한국전통문화의 구성원리와 한글
2)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에서 본 한글
제 3장: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다석과 현재의 한글로 신학하기
4장: 한글로 신학하기의 영성- 동도동기론적 기독교 이해
본문내용
드러난다. 살다란 본래 불사름을 뜻하는 싶다(燒)에서 온 것으로 사람이란 말이 이로부터 파생되었어진 것이다.
) 전게서, 229-230면.
또한 죽었던 불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살아난다고 하며 시들어 메마르던 풀이 단비를 머금고 소생하는 것도 '살아난다'고 하며 반대로 꺼져가는 것을 사라진다라고 일컫는 것도 모두 불사름과 관계된다. 이점에서 인간의 살이 먹은 음식의 연소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듯이 지구의 살이자 삶의 바탕인 흙도 화산작용을 통해 이루워 진 것인바 싶이 흙의 옛 형태인 힝이 본래 같은 말이었다고 하는 것도 의미 깊다.
) 전게서, 228면.
생태학의 어원인 희랍어 가 생명 공간, 즉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는 집을 뜻하며 생명공간 내의 으뜸법칙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고 자신을 불살라 변증법적으로 생성해 가는 전 과정을 보여주는 한글 자음은 땅의 논리, 곧 생명 사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살림살이 역시 살리는 일을 사는 것인바 이것은 영어의 살다(live)라는 말보다 몇 배의 강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자음의 속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사랑이란 것이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전 생명체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살림살이의 대 원칙이라고 본다면 사랑이란 말 또한 싶(燒)앙〉싶랑을 어원으로 하여 유래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타당성을 갖을 수 있다.
) 전게서, 230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양천주(良天主), 체천주( 天主), 즉 우주의 생명(얼)을 내 안에 모셔서 자라게 하고 그것을 이 땅에 구현시켜 내려는 사상, 모든 만물과 만나 그것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겠다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는 모두 사랑의 우주 생명적 의미를 밝혀 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앞서도 언급했듯 김지하가 율려 사상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우주는 자신의 대 변혁을 위해 우주적 휴머니즘의 비전을 체득한 영성적 인간(신인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탄식하고 있는 전 피조물들이 하느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성서 말씀(롬 8:18-25)을 상기시킨다. 바로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을 근간으로 구성된 한글 28자로부터 우리는 이런 新人間, 神人間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민족을 예수의 얼로 거듭나게 하는 존재 생기의 사건이 한글을 통해 가능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글을 기도를 통해 얻으셨고, 현재 김흥호 선생 역시 기도를 통해 그 뜻을 우리에게 풀어내어 주신 것이다.
나가는 글.
이상에서처럼 두분 선생님들은 한글을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진 그릇(祭器)으로 보았다. 천지인 삼재 사상을 근간으로 만든 모음과 음양오행론에 따라 발음기관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자음을 각기 인간을 부르는 하늘의 소리로, 인간이 땅으로부터 전적으로 변화하여 하늘에 이르는 응답으로 해석되었다.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로서, 더욱이 신학적, 계시적인 의미로 읽혀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글로 신학하기는 이땅의 백성이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적 진리가 머리를 사용하는 소수의 전문 지식인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틀 속에서 생활해온 생활 민중들에 의해 해독될 수 있는 것이다.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제 뜻을 펴기 원했던 것처럼 한글로 하느님 계시, 하느님 존재를 자신 안에서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이라 불렀고 한번도 끊어져 본적이 없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하였다.
유영모, 김흥호 두분 선생님은 한글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했다. 우주적 생명의 본질이 본래 있음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비움은 철저하게 '我'의 흔적을 버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움 속에서만 인간은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며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효(孝)는 없이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 살음의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이유가 된다. 비움은 또한 우주생명의 화육을 돕는 생명원리의 길이기도 하다. 我가 사라진 빈탈의 상태에서 진리가 인식되며 우주의 공진화를 이룰 수 있는 참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대상(有)을 지향하게 되고 율법화, 교조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없이 계신 분에 대한 자각은 신학적 행위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깨달음과 관계됨을 환기시켜 준다. 이것은 하느님 형상이란 개념이 이성적 존재, 정신, 영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과 일치를 이루는 부분이다.
) S. Schroen/T. Staubli, Die Symbolik der Bibel, Primus Vevag 1998, ss 1-15.
없이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깨달음으로 '얼'이란 말이 다석 선생님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몸과 무관한 정신이라기 보다는 영육을 아우르는 하느님 형상에 대한 동양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본래 얼은 우주 창생의 근원인 태극이자 삼재의 으뜸인 天(·)을 안쪽에 품고 있는 형상으로 아직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되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없이 있는 것이 바로 얼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얼로부터 태어난 인간이 씨잎이다. 자신속에 하느님 얼을 바탈로 지니고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아 우주 변화 및 화육의 주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변화를 땅에서부터 경험할 수밖에 없다. 땅은 한글 자음이 지시하듯 성숙과 완성을 위해 변증법적 변화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씨잎의 ㄹ이 바로 활용하는 생명, 곧 변화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분열과 상처, 파괴가 난무한 현 세계 안에서 씨잎로서의 우리의 자각은 변화의 방향을 하늘로 이끌어 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글이 주는 신학적 의미이며 하느님 계시의 드러남이라고 믿는다. 가온소리로서의 예수의 얼은 이렇듯 우리에게 제소리를 내도록 이끄는 성령의 역사가 된다.
) 전게서, 229-230면.
또한 죽었던 불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살아난다고 하며 시들어 메마르던 풀이 단비를 머금고 소생하는 것도 '살아난다'고 하며 반대로 꺼져가는 것을 사라진다라고 일컫는 것도 모두 불사름과 관계된다. 이점에서 인간의 살이 먹은 음식의 연소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듯이 지구의 살이자 삶의 바탕인 흙도 화산작용을 통해 이루워 진 것인바 싶이 흙의 옛 형태인 힝이 본래 같은 말이었다고 하는 것도 의미 깊다.
) 전게서, 228면.
생태학의 어원인 희랍어 가 생명 공간, 즉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는 집을 뜻하며 생명공간 내의 으뜸법칙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고 자신을 불살라 변증법적으로 생성해 가는 전 과정을 보여주는 한글 자음은 땅의 논리, 곧 생명 사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살림살이 역시 살리는 일을 사는 것인바 이것은 영어의 살다(live)라는 말보다 몇 배의 강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자음의 속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사랑이란 것이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전 생명체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살림살이의 대 원칙이라고 본다면 사랑이란 말 또한 싶(燒)앙〉싶랑을 어원으로 하여 유래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타당성을 갖을 수 있다.
) 전게서, 230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양천주(良天主), 체천주( 天主), 즉 우주의 생명(얼)을 내 안에 모셔서 자라게 하고 그것을 이 땅에 구현시켜 내려는 사상, 모든 만물과 만나 그것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겠다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는 모두 사랑의 우주 생명적 의미를 밝혀 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앞서도 언급했듯 김지하가 율려 사상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우주는 자신의 대 변혁을 위해 우주적 휴머니즘의 비전을 체득한 영성적 인간(신인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탄식하고 있는 전 피조물들이 하느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성서 말씀(롬 8:18-25)을 상기시킨다. 바로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을 근간으로 구성된 한글 28자로부터 우리는 이런 新人間, 神人間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민족을 예수의 얼로 거듭나게 하는 존재 생기의 사건이 한글을 통해 가능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글을 기도를 통해 얻으셨고, 현재 김흥호 선생 역시 기도를 통해 그 뜻을 우리에게 풀어내어 주신 것이다.
나가는 글.
이상에서처럼 두분 선생님들은 한글을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진 그릇(祭器)으로 보았다. 천지인 삼재 사상을 근간으로 만든 모음과 음양오행론에 따라 발음기관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자음을 각기 인간을 부르는 하늘의 소리로, 인간이 땅으로부터 전적으로 변화하여 하늘에 이르는 응답으로 해석되었다.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로서, 더욱이 신학적, 계시적인 의미로 읽혀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글로 신학하기는 이땅의 백성이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적 진리가 머리를 사용하는 소수의 전문 지식인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틀 속에서 생활해온 생활 민중들에 의해 해독될 수 있는 것이다.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제 뜻을 펴기 원했던 것처럼 한글로 하느님 계시, 하느님 존재를 자신 안에서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이라 불렀고 한번도 끊어져 본적이 없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하였다.
유영모, 김흥호 두분 선생님은 한글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했다. 우주적 생명의 본질이 본래 있음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비움은 철저하게 '我'의 흔적을 버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움 속에서만 인간은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며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효(孝)는 없이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 살음의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이유가 된다. 비움은 또한 우주생명의 화육을 돕는 생명원리의 길이기도 하다. 我가 사라진 빈탈의 상태에서 진리가 인식되며 우주의 공진화를 이룰 수 있는 참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대상(有)을 지향하게 되고 율법화, 교조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없이 계신 분에 대한 자각은 신학적 행위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깨달음과 관계됨을 환기시켜 준다. 이것은 하느님 형상이란 개념이 이성적 존재, 정신, 영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과 일치를 이루는 부분이다.
) S. Schroen/T. Staubli, Die Symbolik der Bibel, Primus Vevag 1998, ss 1-15.
없이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깨달음으로 '얼'이란 말이 다석 선생님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몸과 무관한 정신이라기 보다는 영육을 아우르는 하느님 형상에 대한 동양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본래 얼은 우주 창생의 근원인 태극이자 삼재의 으뜸인 天(·)을 안쪽에 품고 있는 형상으로 아직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되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없이 있는 것이 바로 얼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얼로부터 태어난 인간이 씨잎이다. 자신속에 하느님 얼을 바탈로 지니고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아 우주 변화 및 화육의 주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변화를 땅에서부터 경험할 수밖에 없다. 땅은 한글 자음이 지시하듯 성숙과 완성을 위해 변증법적 변화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씨잎의 ㄹ이 바로 활용하는 생명, 곧 변화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분열과 상처, 파괴가 난무한 현 세계 안에서 씨잎로서의 우리의 자각은 변화의 방향을 하늘로 이끌어 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글이 주는 신학적 의미이며 하느님 계시의 드러남이라고 믿는다. 가온소리로서의 예수의 얼은 이렇듯 우리에게 제소리를 내도록 이끄는 성령의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