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남북국시대의 한국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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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문학의 등장과 그 구실
⑴ 한자의 수용과 활용
⑵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문학
⑶ 국내외의 정치 문서

2. 노래의 새로운 모습
⑴ 고구려 노래
⑵ 백제 노래
⑶ 신라 노래, 이른 시기의 모습
⑷ 향가, 사뇌가

3. 향가의 작품 세계

본문내용

의 관계는 밀접했다. 당은 신라를 친당 세력화하려 하였고, 신라는 당의 문화를 수입하고자 했다. 통일 전쟁 기간 중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조금 소원했으나 전쟁 뒤에는 곧 선린 관계를 회복하여 많은 국서가 교환되었다. 이 때에는 특히 당나라에의 유학이 성행했는데 당에서 과거를 통해 급제한 삶도 58명에 이르렀다. 신라 문인이 당에 가서 활동한 자취가 중국 문헌에 전한다. 薛瑤는 당에 가서 장군이 된 사람의 딸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면서 '返俗謠'를 지었다. 金地藏은 신라의 왕자로 당나라에 가서 승려가 되었다. '送童子下山'이라는 작품이 전하는데 짜임새와 묘미를 갖추고 있다. 金雲鄕은 신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題遊仙寺'가 전한다.
8. 신라 한문학의 성숙
⑴ 신문왕과 설총
신문왕은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국학을 설치하는 등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유학을 공부하는 육두품의 관계 진출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고, 그로 인해 육두품 출신의 문인들은 비판 세력이 되어 갔으며 나라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문학을 스스로 개척했다. 설총이 지은 글로 전해지는 것은 '花王戒'이다. 꽃의 이야기를 가지고 임금을 경계한 글로 식물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글이다.
⑵ 전성기의 수준
신라의 전성기인 성덕왕 때의 이름난 문인으로는 金大問을 들 수 있다. 그는 '高僧傳', '花郞世紀', '樂本', '漢山記'를 지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다룬 범위는 무척 넓었는데 신라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진골 귀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당시에 金志誠이 쓴 조상기는 현재 전하고 있는데 유가 불가 도가를 한데 아우르는 자세가 나타나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序와 銘은 金弼奧가 지었는데 웅대한 기상과 세련된 표현이 갖추어져 있다.
⑶ 말기의 상황과 왕거인
下代에 이르면서 신라의 문학은 더욱 무르익었으나 예전의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文弱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의 모순은 격화되어 왕위를 두고 살육전이 벌어지고, 사치와 낭비는 증가되었으며, 백성에의 수탈은 심해졌다. 육두품은 당나라로 진출하는 길을 찾았고, 지방 호족은 후삼국의 쟁패를 준비했으며 불교에서는 지방 호족과 연결된 禪門九山이 생겨났다. 王巨仁은 당시에 세상을 등지고 산, 그러면서도 잘못된 정치에 항거한 인물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민심을 대변하는 생동감 있는 시를 지었다.
⑷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육두품 출신인 孤雲 崔致遠은 당나라에 유학, 벼슬에 급제한 뒤 '檄黃巢書'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신라인으로서 당나라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귀국하였으나, 신라에서도 자신의 뜻을 올바로 펼 수 없음을 느끼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桂苑筆耕集' 서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영달을 위해 문학에 정진하였으나 문학이 유학이나 불교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는 외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느낀 비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 민중들의 생활 등 여러 가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의 작품은 近體詩의 능란한 표현과 함께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오묘한 조화를 갖춘 말로 엮어져 이루어졌다.
⑸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최언위
崔匡裕는 '東文選'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그의 작품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상을 보태는 것이었는데 개중에는 고국을 떠난 비감을 읊기도 했다. 朴仁範도 최광유와 같은 시기에 당나라에서 급제한 사람이다. 그도 '동문선'에 칠언율시 10편과 贊 2편이 전한다. 문학적 취향은 최광유와 비슷했으나 고사를 많이 동원했으며 불교적 취향에 의거한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崔承祐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귀국하여 견훤을 섬긴 인물이다. '호본집'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한아 전해지지 않고 역시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해온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당나라 말기의 시풍을 지녔으나 견훤의 외교 문서에는 높은 기상과 위엄 있는 면도 보였다. 崔彦위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신라에서 벼슬을 얻었고, 그 뒤에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신라의 문학은 그를 통해 고려 문학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글은 덕을 내세운 부드러운 어조로 되어 있다. 고려에는 골품제가 없었던 탓에 많은 육두품 세력들이 고려를 택하여 최고 지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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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8.06
  • 저작시기2002.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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