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치료하여 건강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목회자는 세상에서 사도로서 복음을 위해 살다 지치고 상처난 성도들을 치유하고 다시 구비시켜 세상에서 봉사(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를 통해 제자를 만들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교회가 해야 할 둘째 임무가 있다. 바로 섬김이다.
교회가 정말 사도적 사명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언제나 교회의 섬김, 봉사 즉 종의 모습에서 밝혀진다고 한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KJV 성경은 "섬김"을 "minister( )"라고 했다. 섬김 ' '는 "식탁에서 봉사하는 것", "웨이터로서 역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신 인자, 치욕, 자기부정, 십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포함한다. ' '는 섬기는 것이고,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활계획을 다른 사람의 생활계획에 종속시키는 것이며, 타인지향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섬김, 봉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을 모방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 역시 섬김, 봉사를 하여야 한다.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
역시 ' '가 사용되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도 가 사용된다. 즉 목회자가 성도들을 온전케하는 이유는 섬김, 봉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
교회는 교회를 섬기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듯이, 자신을 섬기지 않았듯이 교회 역시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을 섬겨서도 안된다. 교회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세상을 섬겨야 한다.
무엇을 섬겨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이다.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픈 자들 즉 필요한 사람들(the needy)이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때이다. 교회의 삶의 자리는 필요한 사람들 속이다.
시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신 10:17-18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교회는 실제적으로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이 섬김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돈만 있으면 교회를 확장하고 수양관을 지으려고 하나 정작 필요한 것은 봉사관이다. 세상속에서 세상의 아픔을 감쌀 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평화를 섬겨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평화이다. 이 평화가 이땅위에서 구현되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견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있다는 말은 교회는 정치적 문제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되는가? 보수적인 사람들은 교회는 정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데모하는 단체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정치적이 되서는 안된다고 한다. 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교회가 정치 중립적이라는 것은 결국 지배자의 편을 드는 것이기에 사악한 중립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자, 힘없고 눌린 자들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힘 센자가 힘 약한 자를 불의하게 구타할 때 초연한 자세로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 경우 교회는 약한 자를 위해 불의한 지배가 종식되도록 일해야 한다. 카톨릭 사목헌장 92항은 그리스도인은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모든 인류와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함을 명하고 있고, 사목헌장 93항은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지상에서 완수해야 할 위대한 과업을 추진할 것을 명하고 있기도 하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불의에 대한 저항이 교회에도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자 편에서만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 속에도 엄청난 죄악과 이기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배자의 불의를 고치는 동시에 가난한 자의 죄악도 고쳐 양자 모두의 공동선을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과 진정( )"은 진리의 성령을 말한다. 즉 성령안에서 드리는 예배,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성도가 성전인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우리의 성전은 움직일 수 있는 성전(potable temple)인 셈이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세상 속에서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즉 목회자는 세상에서 사도로서 복음을 위해 살다 지치고 상처난 성도들을 치유하고 다시 구비시켜 세상에서 봉사(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를 통해 제자를 만들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교회가 해야 할 둘째 임무가 있다. 바로 섬김이다.
교회가 정말 사도적 사명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언제나 교회의 섬김, 봉사 즉 종의 모습에서 밝혀진다고 한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KJV 성경은 "섬김"을 "minister( )"라고 했다. 섬김 ' '는 "식탁에서 봉사하는 것", "웨이터로서 역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신 인자, 치욕, 자기부정, 십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포함한다. ' '는 섬기는 것이고,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활계획을 다른 사람의 생활계획에 종속시키는 것이며, 타인지향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섬김, 봉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을 모방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 역시 섬김, 봉사를 하여야 한다.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
역시 ' '가 사용되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도 가 사용된다. 즉 목회자가 성도들을 온전케하는 이유는 섬김, 봉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
교회는 교회를 섬기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듯이, 자신을 섬기지 않았듯이 교회 역시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을 섬겨서도 안된다. 교회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세상을 섬겨야 한다.
무엇을 섬겨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이다.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픈 자들 즉 필요한 사람들(the needy)이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때이다. 교회의 삶의 자리는 필요한 사람들 속이다.
시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신 10:17-18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교회는 실제적으로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이 섬김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돈만 있으면 교회를 확장하고 수양관을 지으려고 하나 정작 필요한 것은 봉사관이다. 세상속에서 세상의 아픔을 감쌀 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평화를 섬겨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평화이다. 이 평화가 이땅위에서 구현되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견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있다는 말은 교회는 정치적 문제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되는가? 보수적인 사람들은 교회는 정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데모하는 단체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정치적이 되서는 안된다고 한다. 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교회가 정치 중립적이라는 것은 결국 지배자의 편을 드는 것이기에 사악한 중립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자, 힘없고 눌린 자들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힘 센자가 힘 약한 자를 불의하게 구타할 때 초연한 자세로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 경우 교회는 약한 자를 위해 불의한 지배가 종식되도록 일해야 한다. 카톨릭 사목헌장 92항은 그리스도인은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모든 인류와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함을 명하고 있고, 사목헌장 93항은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지상에서 완수해야 할 위대한 과업을 추진할 것을 명하고 있기도 하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불의에 대한 저항이 교회에도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자 편에서만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 속에도 엄청난 죄악과 이기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배자의 불의를 고치는 동시에 가난한 자의 죄악도 고쳐 양자 모두의 공동선을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과 진정( )"은 진리의 성령을 말한다. 즉 성령안에서 드리는 예배,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성도가 성전인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우리의 성전은 움직일 수 있는 성전(potable temple)인 셈이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세상 속에서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