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항전 운동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5)항일 학생 운동

(6)독립군의 구국 항전

본문내용

'조선 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국무 총리. 국방부 장과. 내무부 장관 등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에 중국 대사, 1952년에 자유당 부당수가 되고,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 대한 민국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저서에 회고록이 있다.
*정의부
1924년 11월 만주 길림성 유하현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1920년의 청산리전투 후일본군의 간도지방에서의 학살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 등으로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한때 분산되고 침체하였으므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고, 이것이 다시 대한통의부로 확대발전되어 일단 서간도지방에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통합 후 얼마만에 주도세력 내부에 분열이 생겨 일부세력이 의군부를 만들어 부립해 나갔고, 다시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중심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참의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다시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1924년 7월 전만통일의회주비회가 소집되었고, 각 단체의 대표들이 모인 통합회의 결과 11월에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로서 정의부가 탄생하였다.
*광주학생운동
1929년 광주학생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차별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전쟁경기 속에 비교적 호조를 보이던 일본경제계에는 공황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일본경제의 파국적 위기와 천황제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좌파세력의 진출은 일본정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1)광주학생의 맹휴운동 :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적 학생결사인 성진회는 항일·반식민지·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한, 그리고 광주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화한 항일적 교양과 저항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체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학생계에서 반일을 의식하는 본격적인 동맹휴교와 항일운동은 1927년과 1928년에 항일풍조가 고조됨으로써 성숙해갔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본격적인 항일동맹휴교운동의 도화선은 1928년 6월의 이경채사건이었다.
이경채 권고퇴학의 이유를 밝히라는 요구조건으로 전교생이 동맹휴교에 돌입하였고, 학교 내부 및 광주지방의 차별교육문제에서 식민지교육체제와그 통치기구에 대하여 항쟁하는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한일학생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인 박춘채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고, 그때 역전파 출소 경찰이 일본인 학생을 편들어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김보섭 등 10여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가까스로 큰 충돌은 면하였다.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 사건으로 사태는 급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형식적이며 관료적 차원에서의 수습책이 광주학생들의 굳은 민족의식에 기조를 둔 대일항쟁정신을 토화시키거나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2)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들의 대일항쟁심은 1929년 11월 3일 드디어 대항일학생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최쌍현 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쌍현이 광주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대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집회를 열어 가두시위투쟁을 결행하기로 하고 김병기·강윤석·김용대·김상환 등의 지휘로 목봉과 검도도구 등으로 무장, 시가전을 각오하고 오후 1시 대오를 정비하여 3백여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앞에서 추진력이 강한 김향남·김보섭·김상섭·강윤석·김무삼 등이 서고, 뒤에는 함께 시위하기로 약속된 광주농업학교 학생 일부가 담당하였다. 그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운동가를 고창하였다.
강력한 제지와 해산명령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동을 지나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는데,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강당에 집결하여 김향남·오쾌일·정명섭 등이 차례로 등단하여 '부상자 문제'와 '금후의 연락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귀가하였다.
3)일제의 광주학생탄압 : 광주학생의 항일운동은 목포나주를 비롯하여곧 서울로 전화되었으며,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는 신간회의 영향이 컸으나, 중앙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와 허헌, 서기장 황상규 등이 광주학생항쟁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와서 진상을 보고하자, 한용운·조병옥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때 조병옥·권동진·한용운 등 신간회 회원 44명과 근우·청총·노총 등의 관계자 47명이 검거되었다.
[의 의] 1928년 6월부터 동맹휴교형태로 가열화된 광주학생의 대일항쟁은 날이 갈수록 단계적인 심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첫째, 광주학생들은 당시 사회운동·청년운동을 포함한 민족독립운동에 대해서 민감한 수용력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가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화되어 있을 때 민족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하는 생동력 있는 지성을 추구해나갔다.
둘째, 광주지역에는 이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진회가 창립되어 민족독립의 성취를 위한 이론을 다양하게 연구하여 대일항쟁요원을 육성, 조직한 점이다.
셋째, 일제강점하의 한국사회에서 누구든지 민족적 방향, 그르고 인간적 차원에 선 대일감정이 있었다.
광주학생의 항쟁은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이 길을 위해 식민지 교육체제를 반대하고, 민족교육을 주창하며 궐기한, 한국학생으로서의 민족독립항쟁인 것이다.

키워드

항전,   항일,   학생,   운동,   항전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2.09.29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459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