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초대교회.
A. 기독교 출발의 배경.(정치적배경:로마,문화적배경:헬레니즘,종교적배경:유대교)
1. 정치적 배경 : 로마.
2. 문화적 배경 : 헬레니즘. (기독교 당시 로마의 철학사상)
3. 종교적 배경 : 유대교.(이스라엘의 3대 당파)
B. 사도시대의 특징. (A.D. 30∼100년)
C. 초대 교회 교부들.(속사도 교부 : Apostolic Father)
D. 초대 교회 이단들.(특징, 악영향, 이단으로 규제된 표준).
Ⅱ.고대교회.
A. 3세기의 분파 운동.: Novatianism, Donatism
B. 고대교회의 3대 학파.
C. 콘스탄틴
D. 고대교회의 교리 논쟁과 에큐메니칼 회의.
E. 고대 수도원 운동.
F. Augustinus와 Pleagius의 논쟁.
Ⅲ.중세교회.(A.D.590년∼1517년)
A. 교황권의 성장과 선교.
B. 속권과 성직의 우위 다툼.
C. 화상논쟁 - 787년 제 7차 니케아 Ecumenical Concil.
D. 동·서방교회 분열
E. 십자군 운동
F. 중세의 이단 운동
G. 중세 탈발승(The Friers)
H. 중세 후기(950∼1530) 유럽 수도원의 특징
I. 중세 스톨라 주의
J. 교황권의 약화
K. Mysticism(신비주의)
A. 기독교 출발의 배경.(정치적배경:로마,문화적배경:헬레니즘,종교적배경:유대교)
1. 정치적 배경 : 로마.
2. 문화적 배경 : 헬레니즘. (기독교 당시 로마의 철학사상)
3. 종교적 배경 : 유대교.(이스라엘의 3대 당파)
B. 사도시대의 특징. (A.D. 30∼100년)
C. 초대 교회 교부들.(속사도 교부 : Apostolic Father)
D. 초대 교회 이단들.(특징, 악영향, 이단으로 규제된 표준).
Ⅱ.고대교회.
A. 3세기의 분파 운동.: Novatianism, Donatism
B. 고대교회의 3대 학파.
C. 콘스탄틴
D. 고대교회의 교리 논쟁과 에큐메니칼 회의.
E. 고대 수도원 운동.
F. Augustinus와 Pleagius의 논쟁.
Ⅲ.중세교회.(A.D.590년∼1517년)
A. 교황권의 성장과 선교.
B. 속권과 성직의 우위 다툼.
C. 화상논쟁 - 787년 제 7차 니케아 Ecumenical Concil.
D. 동·서방교회 분열
E. 십자군 운동
F. 중세의 이단 운동
G. 중세 탈발승(The Friers)
H. 중세 후기(950∼1530) 유럽 수도원의 특징
I. 중세 스톨라 주의
J. 교황권의 약화
K. Mysticism(신비주의)
본문내용
립되는 가운데서 계속 교황권이 확장되어갔고, 인노센트3세 때에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교황권은 제국과의 갈등에서 생겨난, 관료체제 속에서의 세속적 욕망, 사치등으로 인해 13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점차 몰락되어 갔다. 7. 서방 교회의 창의적 신학사상 : 스콜라주의 신학전통. 950∼1350에는 또한 신학적인 창의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기독교 신학사상은 보통 '스콜라 철학'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이성으로 검증하는 등 신앙을 철학과 연결시켰다. 안셀름과 아퀴나스는 종합주의적 스콜라주의 신학을 펼첬다. 그러나 스코투스와 옥캄, 제르송, 다이등이 지향하는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에 의해 중세의 신학적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따라 믿는 신앙과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8.서유럽의 교구생활, 공적인 예배, 훈련, 그리고 사적인 예배와 경건. 950∼1350년 카톨릭 교회는 주교관구와 사제교구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구는 지역주민의 공동체적 활동이 일어나는 중심단위 였고, 주교가 교구 생활을 관리했다. 또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오늘날 까지 세례, 견신례, 고해성사, 성만찬, 종유, 혼례성사 및 서품성례 등 7개의 성례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또한 캘린더가 중요했는데, 여러 가지 절기가 있었고 성자들과 성모 마리아를 숭배했고, 기독교적 문화도 꽃피었다.
기독교 교회사 98. 4. 17. 9831090 배 정 욱.
9. 서유럽 형성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 950∼1350년 어간의 기독교 상황은 500년 이전과 다르다. 이 기간동안의 로마 제국이란 명목상으로 존재했고, 서유럽의 문화와 문명은 2세기부터 시작된 국내적 부패와 6세기동안 괴롭혀 온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였고 학문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미신만 무엇했다. 이때 기독교는 도덕, 지성적 활동, 예술, 권력, 경제, 노동, 공동체적 삶 등에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일구어 내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점차 기독교는 거대한 제도적 교회와 동일시 되어갔다. 10. 950∼1350년 어간의 동방 교회들. 950∼1350년 어간 동방의 기독교는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이 놓여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주된 정치적 보루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져 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대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수가 되었고,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 세력이 된 모슬렘 세력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들 가운데 새로운 갱신 운동을 보이는 공동체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기독교는 서유럽의 기독교가 경험했던 생동성과 갱신의 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동방 교회는 1350년 이후 서방 교회보다 내리막길을 달렸다.
제3장 A.D.1350∼A.D. 1500 : 몰락하는 후기 중세기. 1350∼1500년 어간의 서유럽의 교회 역사는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하려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기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대조를 보여 주었다. 기독교를 명목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제로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일들이, 사람들을 기독교적 이상에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찍이 만들어진 제도적 교회들 안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예외가 많기는 했으나 교구성직자들,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들, 교황청 및 교황 자신이 부패하였다. 특히 이 기간동안에는 교황제도 자체가 목적 수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 약 2세대에 걸쳐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갔었고,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같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아비뇽 포로로 인한 대분열 이후 교황청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상적 측면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태리의 정치게임에 말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대분열을 치유하고 교회를 정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공의회주의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서유럽은 교회를 지배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는 절대군주들과 교회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교회 사이에 싸움이 여러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취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이 위협을 받았다.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갈망하여 생긴 수도원 운동 역시 활기와 생기를 잃었고 도덕성과 영적 비전을 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4∼5세대 전만 해도 명목상의 기독교인 무리들을 그리스도께 헌신케 하며 불신의 세계를 선교하려고 등장했던 구걸승단 역시 서방 기독교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서기를 멈추었고 이 울타리 안에서 사기를 잃어갔다. 950∼1350년 어간 동안에 서유럽에서 발흥했던 수많은 기독교 신앙운동의 불길은 1350∼1500년 어간에는 더 이상 타오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타오르려던 불길은 민족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통해서 부활한 이교주의 및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 등으로 질식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측면에 유의해야 한다. 먼저 많은 운동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들 중 어떤 운동들은 건강한 활력을 증거한다. 영국과 보헤미아에서는 새로운 운동들이 기성 제도권 교회에 순응하지 않다가 축출당하기도 했다. '복음의 넘쳐 흐르는 능력'은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 모습은 풀뿌리부터 솟아오르는 스페인 등에서의 개혁운동인데 이들은 기성 교회 조직을 파고들어갔다. 이는 서유럽 기독교를 개혁시킬 수 있는 저력에 속했다. 이들은 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 반하여 의식적인 기독교적 신앙을 보였다. 두 번째 모습은 지리적 요인으로서 로마제국의 멸망이전 라틴 문화에 전적으로 동화되었고 6세기 이전에 회심을 경험한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운동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적 모형을 따름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도덕적 부패를 씻는 일을 했고, 반면에 라틴 문화가 소멸되었거나 6세기 이후까지 기독교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던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형태의 개혁운동들이 일어나 소위 프로테스탄티즘 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물결로 일어났던 것이다.
기독교 교회사 98. 4. 17. 9831090 배 정 욱.
9. 서유럽 형성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 950∼1350년 어간의 기독교 상황은 500년 이전과 다르다. 이 기간동안의 로마 제국이란 명목상으로 존재했고, 서유럽의 문화와 문명은 2세기부터 시작된 국내적 부패와 6세기동안 괴롭혀 온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였고 학문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미신만 무엇했다. 이때 기독교는 도덕, 지성적 활동, 예술, 권력, 경제, 노동, 공동체적 삶 등에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일구어 내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점차 기독교는 거대한 제도적 교회와 동일시 되어갔다. 10. 950∼1350년 어간의 동방 교회들. 950∼1350년 어간 동방의 기독교는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이 놓여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주된 정치적 보루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져 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대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수가 되었고,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 세력이 된 모슬렘 세력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들 가운데 새로운 갱신 운동을 보이는 공동체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기독교는 서유럽의 기독교가 경험했던 생동성과 갱신의 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동방 교회는 1350년 이후 서방 교회보다 내리막길을 달렸다.
제3장 A.D.1350∼A.D. 1500 : 몰락하는 후기 중세기. 1350∼1500년 어간의 서유럽의 교회 역사는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하려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기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대조를 보여 주었다. 기독교를 명목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제로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일들이, 사람들을 기독교적 이상에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찍이 만들어진 제도적 교회들 안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예외가 많기는 했으나 교구성직자들,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들, 교황청 및 교황 자신이 부패하였다. 특히 이 기간동안에는 교황제도 자체가 목적 수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 약 2세대에 걸쳐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갔었고,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같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아비뇽 포로로 인한 대분열 이후 교황청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상적 측면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태리의 정치게임에 말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대분열을 치유하고 교회를 정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공의회주의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서유럽은 교회를 지배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는 절대군주들과 교회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교회 사이에 싸움이 여러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취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이 위협을 받았다.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갈망하여 생긴 수도원 운동 역시 활기와 생기를 잃었고 도덕성과 영적 비전을 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4∼5세대 전만 해도 명목상의 기독교인 무리들을 그리스도께 헌신케 하며 불신의 세계를 선교하려고 등장했던 구걸승단 역시 서방 기독교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서기를 멈추었고 이 울타리 안에서 사기를 잃어갔다. 950∼1350년 어간 동안에 서유럽에서 발흥했던 수많은 기독교 신앙운동의 불길은 1350∼1500년 어간에는 더 이상 타오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타오르려던 불길은 민족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통해서 부활한 이교주의 및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 등으로 질식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측면에 유의해야 한다. 먼저 많은 운동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들 중 어떤 운동들은 건강한 활력을 증거한다. 영국과 보헤미아에서는 새로운 운동들이 기성 제도권 교회에 순응하지 않다가 축출당하기도 했다. '복음의 넘쳐 흐르는 능력'은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 모습은 풀뿌리부터 솟아오르는 스페인 등에서의 개혁운동인데 이들은 기성 교회 조직을 파고들어갔다. 이는 서유럽 기독교를 개혁시킬 수 있는 저력에 속했다. 이들은 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 반하여 의식적인 기독교적 신앙을 보였다. 두 번째 모습은 지리적 요인으로서 로마제국의 멸망이전 라틴 문화에 전적으로 동화되었고 6세기 이전에 회심을 경험한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운동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적 모형을 따름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도덕적 부패를 씻는 일을 했고, 반면에 라틴 문화가 소멸되었거나 6세기 이후까지 기독교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던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형태의 개혁운동들이 일어나 소위 프로테스탄티즘 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물결로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