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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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개혁의 지속:개신교의 自立
(1)아우구스부르그 화의
(2)위그노 전쟁과 낭뜨 칙령
(3)네델란드의 칼빈주의
(4)청교도혁명
(5)30년전쟁
(6)미국에서의 개신교

Ⅱ.정통주의:경건과 이성의 도전
(1)신비주의와 경건주의
(2)감리교운동
(3)미국의 대각성운동
(4)합리적 사고
(5)슐라이에르마허

Ⅲ.혁명의 불길
(1)미국독립
(2)프랑스 혁명
(3)키에르케고르
(4)제3세계의 기독교

본문내용

위해서는 카톨릭의 협조가 필요함을 인식
.절대군주의 전형적인 종교정책을 볼 수 있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러한 정책을 썹던 것을 볼 수 있다. (Cf. 곤잘레스1, pp.131-4.)
하고 또한 대외적으로도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카톨릭 교회와 제휴해야 함을 알고 프랑스 협정을 1801년 맺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2년 무모한 러시아 정벌에 나서 큰 피해를 보게 되며 결국 1814년 제위를 물러나 엘바섬에 유배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계승자도 결산자도 아니다. 다만 그는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성과를 분배하며 프랑스 국민에게 위대한 프랑스의 모습을 심어준 자였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사상을 전 유럽에 퍼뜨림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그럼으로 전제정치와 구체제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다.
.민석홍, p.220.
(3)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를 혁명의 항목에 놓은 것은 그의 신학이 혁명적이라기 보다는 그의 삶이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는 19세기를 산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다. 그는 헤겔철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고 진리는 항상 소수안에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던 자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반은 합리성도 아니고 절대의존감정도 아니다. 기독교는 결국 신앙의 문제이며
.곤잘레스2, p.93.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그는 신앙이 결코 안이하거나 조용한 삶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언제나 위험을 안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위험한 신앙의 적은 이러한 신앙의 실존을 가로막는 기존의 기독교권인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했으며 기독교인의 흉내를 내는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는 성직자들을 공박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이러한 물음은 결국 종교개혁의 불꽃이 다 사라지고 재만 남아버린 교회를 향해 던진 비수인 것이다. 개혁자들이 거부하던 의식과 형식적인 신앙의 양태가 다시금 나타나고 신학적으로도 조직화가 기세를 떨칠 때 키에르케고르는 체계의 환상을 버리고 인간의 본질을 찾으며 신앙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4)제3세계의 기독교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19세기는 식민지의 급격한 확장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새로 독립한 미국이 식민지 쟁탈의 대열에 가담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과 생산의 증가가 거대한 자본과 보다 넓은 시장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는 탐욕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오히려 교회는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선교열에 휩싸이게 된다. 19세기 선교활동의 특징은 선교협회의 설립으로 특히 평신도에 의한 선교협회가 많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교협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의 앞잡이라고 불린다는데 있다. 물론 이들이야말로 식민지주의를 반대한 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곤잘레스2. p.117.
그러나 식민지 확장과 선교영역의 확장이 중복된 것은 사실이며 이들 양자가 서로 돕기도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당시의 선교는 인도 대륙에 우선적으로 실시된다. 18세기 초에 첫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간 인도는 윌리암 케리라는 현대 선교의 창시자가 사역한 곳으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맺지는 못한 곳이다. 중국 역시 많은 투자가 있었으나 아편전쟁
.아편전쟁(1839-42)은 서구의 식민지 역사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으로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이 영국에 양도되는 계기가 된다.
이나 태평천국의 난 등을 통해 기독교가 부정적으로 중국인들에게 刻印 된다. 결국 의화단의 난(1899-1901)이 일어나 수천명의 선교사와 개종자가 살해되고 만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4년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상륙하게 되고 이 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개신교는 계속 성장하여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는 점진적이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1914년 경에는 교회가 모두 세워진 상태였다. 아프리카 북부의 모슬렘 지역에 대한 선교는 오히려 카톨릭쪽에서 결실을 거두어 유니에이트(합동동방카톨릭교도)
.곤잘레스2, p.131.
를 흡수하게 된다. 그러나 모슬렘에 대한 선교는 아직까지도 쉽지 않은 상태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립과 함께 개신교회가 세워진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부는 이민을 적극 장려하게 되는데 이는 필요한 인력의 충당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곤잘레스2, pp.135-6.
결국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신앙도 받아들이게 되며 원주민들 사이에 개신교 신앙이 자연스럽게 전파되게 된다.
마치면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 모든 사건이 동일한 중요성을 지닐 수는 없다. 그런데 역사의 과정 중에서 분명 큰 역할을 하는 사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歷史家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공통점은 분명 있다. 교회사에 있어서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있으며 근세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 순간의 轉移點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먼저 개신교가 새로운 思考가 아니라 旣成의 모습이 될 때 까지를 한 개의 전이점으로 잡아보았다. 이 전이점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로 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제 개신교가 공인되어졌다는데 있다.
다음으로는 이것을 도전하여 극복하려는 노력들을 또 하나의 전이점으로 보았다. 이런 도전들은 작은 종교개혁이었으며 기독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잔존하여 있던 중세의 잔재를 폭발적으로 제거시킨 혁명의 모습을 최종적인 전이점으로 삼아보았다. 아마 현대로 접어드는 새로운 전이점은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지 모르나 제3세계의 선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약 350여년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다루지 못하거나 빈약한 부분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는 주관성이 지배하는 객관화의 무대이기에 나름대로 타당한 대답을 했다고 여겨진다. 1차로 정리된 이 근세교회사가 점점 풍성해지고 무엇보다도 생산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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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4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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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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