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고대 기독교
1. 속사도 교부들
2. 복음의 변증(희랍의 변증신학자들)
3. 이단들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
4. 고대 7에큐메니칼 공의회
Ⅱ. 중세 교회사
1. 중세 교황주의의 발전과정과 교회론
2. 몰락하는 중세기
Ⅲ. 근대 교회사 (루터와 칼빈, 재세례파, 반종교개혁)
1. 루 터
2. 칼 빈
3. 좌경화 종교개혁(재세례파)
4. 반 종교개혁
Ⅳ. 17세기 정통주의
Ⅴ. 18-19세기 한류와 난류
1. 속사도 교부들
2. 복음의 변증(희랍의 변증신학자들)
3. 이단들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
4. 고대 7에큐메니칼 공의회
Ⅱ. 중세 교회사
1. 중세 교황주의의 발전과정과 교회론
2. 몰락하는 중세기
Ⅲ. 근대 교회사 (루터와 칼빈, 재세례파, 반종교개혁)
1. 루 터
2. 칼 빈
3. 좌경화 종교개혁(재세례파)
4. 반 종교개혁
Ⅳ. 17세기 정통주의
Ⅴ. 18-19세기 한류와 난류
본문내용
니며, 이 둘의 혼합물도 아니며, 교리(Dogma)가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직관(Anschauung)이고 감정(Gefuhl)"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정통주의의 교리를 거부한다. 교리는 단지 종교적인 직관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제 2 차적인 문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17세기 교리중심의 주입식 신앙교육을 거부하고 신앙의 출발점으로 개인의 내면적인 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와 철학을 하나의 절대정신으로 통일시키려는 헤겔식의 보편주의적 종교철학은 좌파 헤겔주의와 우파 헤겔주의로 나뉘어 진다. 좌파 헤겔주의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형이상학이 말하는 절대정신은 인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 절대정신은 모든 물질위에 근거지워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우파 헤겔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기독론, 세례와 성만찬 등의 신학적 주제들을 헤겔철학에 의하여 변증하였다. 리츨은 헤겔의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칸트의 실천이성을 중요시하는 신칸트 계열의 신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와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집중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19세기 리츨, 하르낙, 트뢸취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의 신학을 '문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문화신학(Kultur-protestantismus)'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리츨은 '하나님 나라' 개념을 중요시 여겼는데,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사회적 하나님 나라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선교, 성화를 강조하는 윤리적 기독교를 강조하였다. 리츨의 영향을 받은 하르낙, 트뢸취에게서도 기독교는 윤리적 기독교였다. 하르낙은 "종교는 도덕의 영혼이고, 도덕은 종교의 몸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C. 난류 1 :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17세기 교파별 교리주의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계몽주의와 함께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슈패너'는「coellegia pietas」라는 무리를 만들어 성경공부와 기도, 설교, 경건서적 읽기를 하였으며, 만인제사장설을 강조하였고 경직화된 정통교리 보다는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다. 이 무리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서 기성교회를 갱신시키는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ecclesiae in ecclesia)이었다. 1686년 프랑케는 슈패너의 영향아래「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의 무리」(collegium philobiblicum)를 만들어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한편 경건주의는 기성 교회내에서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여러 분리주의 종파들이 경건주의로부터 파생되었다. 그 중에 형제단교회, 모라비안교회, 친젠도르프의 경건주의 운동이 대표적이다. 특히 친젠도르프는 슈패너와 프랑케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본래는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으나 "헤른후트"중심으로 교육과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결국 분리주의로 나갔다.
D. 난류 2 : 18-19세기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 중심으로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조나단 에드워드 중심의 미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선교의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시대상황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7세기말 영국교회는 성공회와 비국교도 사이의 싸움으로 영적 활기를 상실하였고, 18세기 초엔 계몽주의와 半정통주의와 회의주의(D. Hume)로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인해 국가는 실업자와 인구의 도시화로 공교육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상황속에서 등장한 것이 웨슬리 형제와 기타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독일경건주의의 창시자 슈패너가 1670년경에 "경건한 무리"를 창설한 이래로 영국 런던에서는 1678년경 소수의 젊은이들이 "종교적 모임들"을 조직하였으며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모임 역시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모임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실천적 목적으로 읽었으며, 경건한 삶을 양육시켰고, 성찬을 종종 나누었다. 요한 웨슬레는 그후 모라비안 선교단체의 영향과 루터의 로마서와 갈라디아 주석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많은 설교를 하며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이 "종교적 모임들"에 접근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는 영국과 미국에서 큰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다. 19세기에는 복음주의 계통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왔다. 한편, 19세기에는 국교회 안에서도 복음주의파가 생겼다. 이들은 '저교회파'로서 옥스퍼드 운동으로 새로 등장한 '고교회파'에 맞섰다. 이와 더불어 자유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광교회운동'도 있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1726년 뉴저지의 화란 개혁교회 계통에서 일어났는데, 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러나 독립전쟁과 대륙의 이신론의 영향으로 미국의 기독교는 하향곡선을 그렸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1792년 제2차 대각성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1800년데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운동기간에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이 찰스 피니였다.
18세기에는 프랑케와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경건주의 운동에 영향받아 18세기 영국의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근대 개신교 선교의 원동력으로써 교회갱신의 힘이기도 했다. 1705년의 모라비안 선교, 윌리엄 캐리를 파송한 1772년의 "이교도들을 위한 복음전도 침례교 협의회", 1795년의 "초교파적 런던 선교협의회", 1799년의 "영국 성공회의 교회 선교협의회" 등은 모두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의 소산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초자연(계시, 교회, 신학)으로부터 이성을 해방시켜, 기독교를 자연종교화 시켰고, 성경의 구속사, 복음, 이신칭의 및 성화,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시했다면, 18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이같은 기독교의 세속화의 흐름을 막아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낳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C. 난류 1 :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17세기 교파별 교리주의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계몽주의와 함께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슈패너'는「coellegia pietas」라는 무리를 만들어 성경공부와 기도, 설교, 경건서적 읽기를 하였으며, 만인제사장설을 강조하였고 경직화된 정통교리 보다는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다. 이 무리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서 기성교회를 갱신시키는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ecclesiae in ecclesia)이었다. 1686년 프랑케는 슈패너의 영향아래「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의 무리」(collegium philobiblicum)를 만들어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한편 경건주의는 기성 교회내에서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여러 분리주의 종파들이 경건주의로부터 파생되었다. 그 중에 형제단교회, 모라비안교회, 친젠도르프의 경건주의 운동이 대표적이다. 특히 친젠도르프는 슈패너와 프랑케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본래는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으나 "헤른후트"중심으로 교육과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결국 분리주의로 나갔다.
D. 난류 2 : 18-19세기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 중심으로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조나단 에드워드 중심의 미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선교의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시대상황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7세기말 영국교회는 성공회와 비국교도 사이의 싸움으로 영적 활기를 상실하였고, 18세기 초엔 계몽주의와 半정통주의와 회의주의(D. Hume)로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인해 국가는 실업자와 인구의 도시화로 공교육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상황속에서 등장한 것이 웨슬리 형제와 기타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독일경건주의의 창시자 슈패너가 1670년경에 "경건한 무리"를 창설한 이래로 영국 런던에서는 1678년경 소수의 젊은이들이 "종교적 모임들"을 조직하였으며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모임 역시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모임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실천적 목적으로 읽었으며, 경건한 삶을 양육시켰고, 성찬을 종종 나누었다. 요한 웨슬레는 그후 모라비안 선교단체의 영향과 루터의 로마서와 갈라디아 주석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많은 설교를 하며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이 "종교적 모임들"에 접근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는 영국과 미국에서 큰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다. 19세기에는 복음주의 계통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왔다. 한편, 19세기에는 국교회 안에서도 복음주의파가 생겼다. 이들은 '저교회파'로서 옥스퍼드 운동으로 새로 등장한 '고교회파'에 맞섰다. 이와 더불어 자유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광교회운동'도 있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1726년 뉴저지의 화란 개혁교회 계통에서 일어났는데, 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러나 독립전쟁과 대륙의 이신론의 영향으로 미국의 기독교는 하향곡선을 그렸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1792년 제2차 대각성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1800년데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운동기간에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이 찰스 피니였다.
18세기에는 프랑케와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경건주의 운동에 영향받아 18세기 영국의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근대 개신교 선교의 원동력으로써 교회갱신의 힘이기도 했다. 1705년의 모라비안 선교, 윌리엄 캐리를 파송한 1772년의 "이교도들을 위한 복음전도 침례교 협의회", 1795년의 "초교파적 런던 선교협의회", 1799년의 "영국 성공회의 교회 선교협의회" 등은 모두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의 소산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초자연(계시, 교회, 신학)으로부터 이성을 해방시켜, 기독교를 자연종교화 시켰고, 성경의 구속사, 복음, 이신칭의 및 성화,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시했다면, 18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이같은 기독교의 세속화의 흐름을 막아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낳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