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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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서 론
2 장 호남 선교의 시작
3 장 선교 사업의 발달

본문내용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전개 하였으며 1900년에는 오원 의사가 휘팅(Georana Whiting)양과 결혼함으로써 목포 선교진은 인원이 한사람 늘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운의 기록을 보면 목포의 복음 선교는 세례교인 몇 사람이 타처로 부터 이주해온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말함을 보아 사기에 초신자로 기록된 사람들 중 몇사람은 다른곳에서 세례를 받은 후 목포에 이주해 온 자들인것 같다. 목포 지방의 선교는 그 시초에 있어서 전주와 군산과는 달리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의 협동으로 개시된 것이 특징이다.
제 3 장 선교 사업의 발달
1. 학교선교
초기 호남선교사(湖南宣敎史)에 있어서 복음선교나 병원선교 분야에 있어서는 상당한 인적, 물적, 투자가 가해진 반면, 국민 대다수가 무지속에 빠져있어서 교육을 통한 선교 활동이 극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대한 활동은 그리 활발히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선교회의 기본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처음부터 선교회는 기독교 학교의 목적을 신자의 자녀교육에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회가 기독교 학교로 구상할 때에는 기독교 선교를 위한 미래의 지도자 양성에 그 의의를 둔것이지 그것을 통해 불신자들을 전도 한다는 적극적인 선교수단으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형편상 불신자의 입학을 허용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전체 학생수의 60% 이상은 언제나 신자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선교회의 원칙이었다. 학교 설립의 문제에 대해서는 1901년 전주 스테이션에서 비로소 관심을 표명 하였다. 어쨌든 교회가 구한말 한국사의 전환점에서 근대 교육을 도입하여 실시 했다는 것은 하나의 교육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2. 병원선교
1910년 이전에 있어서 호남지방의 서양 의술 보급은 의료선교사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료활동은 환영을 받았다. 이시기에 서양 의술을 배워 호남지방에서 일한 유일한 한국인 의사는 오긍선 뿐이었다. 초기의 의료선교는 의사의 부족으로 많은 고충을 겪고 있었다. 러.일 전쟁이 벌어질 무렵에는 호남의 의료선교 사업은 전면 중단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의료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작은 수효로 과대한 일을 해 내야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오랫동안 열악한 조건속에서 고전하던 단(T.H. Daniel)의사는 1906년 알렉산더 (A. J. Alexander)의사의 기부금으로 프란시스 부릿지스 엥킨슨 기념병원 (Francis. Bridgges Atkinson Hospital)의 일부를 완공했다. 이 병원은 수술실 하나와 환자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2개의 병동을 갖추고 있었는데 남장로교 선교부가 호남지방에 세운 최초의 병원이었다. 당시 의료 선교사들의 노력은 헌신적이었음에는 두말할것도 없다. 나병환자 까지도 꺼리지 않고 사랑의 실천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나병환자들을 위한 병원은 영국 에딘버러 나병협회의 도움으로 1912년 정식으로 개원했다.
3. 문서선교
남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에 크게 기여 할 수 있었던것은 이눌서의 성서번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 있던 로쓰(Ross)판 성서는 거의 중국성서를 한글로 옮겨놓은 것이어서 원의 (原意) 의 재생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어 번역 역시 서툴은 것이 많아서 새 번역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렌튼, 그리고 트롤로우프 등으로 구성되는 성서번역위원회(聖書飜譯委員會)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번역위원들의 기고의 노력 끝에 1900년 신약 성서에 한하여 임시 번역판 (Provisional Version) 이 간행될수 있었다. 그러나 아펜젤러 목사의 사망으로 번역위원회에서는 성서 번역만 전념할 수 있도록 기구를 개편 하였는데 북 장로교의 게일박사, 언더우드 박사, 남장로교의 레이놀드(W.D Reynolds = 이눌서)로 구성되었다.작업은 급속도로 진전 되었으나 언더우드의 신병과 게일의 안식년차 귀국으로 모든 책임이 이눌서 한사람에게 지워졌다.
결론
1892년 미국 센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인 테이트(최으덕), 메리 테이트(최마태), 전켠(전위렴), 레이놀드(이눌서), 데이비스, 리번 ,볼링은 이국(異國)땅인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었고 이들을 맞이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호남인 전주(全州)에 교회가 세워지고 군산(群山)에 목포(木浦) 광주(光州) 또 순천(順天) 지방에 교회가 생기는 곳마다 어둠에 눌려 있는 한국민족에게 기쁨의 서광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뜻하지 않은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된서리에 짓눌려 버렸고 또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湃)문제로 혈맹(血盟)을 맺어온 선교사들이 강제로 추방당하고 심혈(心血)을 기울여 세웠던 학교며, 병원이 다 문을 닫고 떠나버렸다.한국 민족은 남의 민족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짊어져야만 했다. 더구나 신사참배의 강요로 숱한 성도들이 죽어갔고 가시밭길을 걸어야만했다. 해방을 맞아 뛸듯이 기뻤지만 하나님 어찐 일입니까? 민족의 수난 6.25가 닥쳤고 여기 저기서 예수를 믿는다고 죽음을 당해야만 했고 교회안까지 그 물결은 계속됫다. 원당교회 신광, 해성, 만경, 덕암, 제내리, 영암읍, 도암, 야월, 백수, 임자, 죽동, 대송등등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이들의 흘린 피가 오늘도 흐르고 있다도 믿는다. 이들의 피값으로 오늘의 교회의 성장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의 나눠지고 나눠져서 더이상 나늘것이 없는 모습, 기업화 되어가고 건물만 우뚝 솟은채로 그속은 이미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들을 바라볼 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와 초기 선교사들과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 앞에 다시한번 각성해야 할것이다.서로 협력을 이룰려고 노력할 때에 교회들이 하나로 뭉치게 될것이다. 나의 교회만 주장하던 모습들이 나의 이웃을 먼저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때에 만물이 밤이슬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교회도 소리없이 성장하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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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5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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